[김명환의 시간여행] [5] 800여 동물 '都心 공해' 겪던 창경원… 사람 공격 원숭이엔 수갑 채워 '징벌'
"그 독한 가스를 동물들이 계속 들이마시면 동물원을 발칵 뒤집을지 모릅니다. 동물원 앞은 최루탄 발사를 삼갈 수 없습니까." 1964년 4월 창경원 동물원 측이 경찰에 절박한 요청을 했다. 한 달째 이어진 '대일 굴욕외교 반대' 학생 시위로 동물들의 최루탄 고통이 위험 수위에 이른 것이다. 한국 최고 동물원이 하필이면 서울대·성균관대로부터 직선거리 700m 이내에 자리 잡은 게 화근이었다. 시민들은 가까워 좋았지만 동물들에겐 가혹한 곳이었다. 800여 마리가 살기엔 면적부터 좁았다. 오늘의 근교 동물원이 전원주택이라면 창경원 동물 우리는 감옥 같았다. 갑갑한 철창 안에서 동물들은 매연·소음 등 공해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낙엽 지는 소리에도 귀를 쫑긋한다는 초식동물들은 원남동 길을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에 놀라 날뛰다 잇따라 죽었다. 전쟁 후 1960년대까지 캥거루 일가족 3마리를 비롯, 꽃사슴·고라니 등 50여 마리가 소음 때문에 횡사했다. 창경원 앞길엔 '음향관제구역/제한속도 시속 5마일'이란 표지판이 섰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1971년 이 일대 소음은 86.5㏈까지 올랐다. 주택가 기준 40㏈의 2배가 넘었다.
최루탄이나 소음보다 더한 공해는 따로 있었다. '인간 공해'였다. 동물을 코앞에서 만나게 꾸몄으니 무개념 관람객들이 동물을 학대하기도 쉬웠다. 돌 던지고 이물질 먹이는 정도의 일은 셀 수도 없다. 1961년 10월 '녹용 먹고 북진통일 해야 한다'는 정신이상 청년이 꽃사슴 머리를 잘라 간 사건은 가장 끔찍한 일로 꼽힌다. 안타까운 죽음들이 하도 많아, 1969년 창경원 개원 60주년 땐 회갑 잔칫상 외에 '제사상'을 따로 차려 동물위령제를 지냈다(조선일보 1969년 10월 26일자). 나라 살림이 넉넉지 않던 시절, 동물원도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1963년엔 '사자·호랑이 싸움'을 개최해 수익금을 운영비에 보태자는 말까지 나왔다. 1974년 기린이 병사하자 동물원 측은 호랑이 먹일 고기 값을 아껴 보려고 기린의 사체를 맹수 우리에 던져 주기도 했다. '동물 복지'까지 생각하는 오늘과는 너무 달랐다. 갇혀 사는 동물들의 거친 행동은 스트레스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옛 동물원에선 난폭한 동물은 '깡패'로 보고 응징했다. 1973년 코끼리가 뿜어낸 콧물을 맞은 관객들이 "이놈 버릇 좀 고쳐 놔라"고 항의했다. 동물원은 '범행' 코끼리를 좁은 우리에 가둬 금족령을 내렸다. 한 달 뒤엔 원숭이가 동물원 소장의 점퍼를 앞발로 쳐 찢었다. 동물원은 원숭이에게 수갑을 채웠다가 3일 뒤에 풀어줬다(조선일보 1973년 6월 8일자).
서울 한복판 동물원은 1984년에야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며 한 시대를 마무리했다. '왜놈들이 왕실을 모욕하려 만들었으니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1955년 신문에도 보이지만 참으로 오랜 세월 꿈쩍도 않고 버텼다. 최근엔 어린이들이 멀리 가지 않고도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도록 백화점 등에 꾸민 '순회 동물원'이 인기라지만, 그곳 동물들 고통이 심각한 지경이라 한다. 관람객에게 편한 동물원일수록 동물에게는 괴로운 곳이라는 창경원의 가르침이 다시 되새겨진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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