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8] 외출 학생들 떨게 한 '교외 지도교사'… 극장 출입 단속하다 도심 추격전도
1959년 7월 21일 오후, 공포영화 '괴인 드라큘라'를 상영 중이던 서울 을지로 모 극장 객석에 진짜 공포가 닥쳤다. "교외(校外) 학생 생활 지도교사가 단속 나왔다"는 누군가의 말에 수많은 중·고교생이 한꺼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소동이 빚어졌다. 학생들이 뒷문으로 후다닥 줄행랑을 놓자, 상영관 입구에서 극장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지도교사들이 추격하기 시작했다.
영화 내용을 불문하고 학생들의 극장 출입을 엄하게 금지하던 1970년대 후반까지, 초만원 극장마다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심심찮게 빚어졌다. 학교 바깥에서 학생들 탈선을 단속하는 '교외 지도교사'가 등장한 건 1958년쯤이다. 1963년 서울의 지도교사 200명이 상반기 6개월간 단속한 학생은 8256명이나 됐다. 교사들은 연말이면 '성급한 인생을 모험하는 남녀 학생'들을 훈계하느라 변두리 여관까지 뒤졌다. 가장 빈번하게 단속한 곳은 극장이었다. '교외 지도교사 신분증'을 마패처럼 극장 측에 보이곤 객석을 덮쳤다. 1966년 5월 어느 일요일, 학생이 200여명이나 입장해 있던 명동 유명 개봉관을 교외 지도교사들이 급습,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끌어내 아수라장이 됐다. 극장 직원은 "지도교사들 때문에 장사 못 해먹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단속반이 태풍처럼 한 번 극장을 휩쓸고 가면 3~4일은 손님이 덜 든다는 것이었다. 교외 지도교사를 빙자해 공짜 입장하는 이가 하루에 30~40명도 더 된다고 했다. 선생님들도 고충이 많았다. "어느 극장에선 검표원이 깡패처럼 우리를 위협한다"며 "권총이라도 차고 다녀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1966년 5월 17일자)
영화관에 간 학생들에겐 단속 교사들만큼 공포스런 존재도 없었다. 단속을 피해 보려고 2층 구석 자리에 앉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 가면 불이 켜지기 전에 도망치듯 나가는 수가 많았다. 물론,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단속 교사들은 상영 도중 컴컴한 객석으로 불시에 돌진해 학생들을 귀신같이 잡아냈다. 필요하면 플래시도 비췄다. 마음 약한 여중생은 영화 관람 도중 뒷문 열리는 소리와 단속반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울음을 터뜨렸다. 잡힌 학생들은 3, 4일씩 유기정학을 당했다. 그런데도 많은 까까머리 중·고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영화관을 계속 찾아 동서양 스타들에 빠졌다. 이렇다 할 여가 생활을 즐기기 어렵던 시절, 시네마천국의 판타지가 세상살이와 공부의 중압감을 그나마 덜어줬기 때문일 것이다. 작고한 어느 언론인은 '영화관 출입은 학생 신분을 건 모험'이었다면서도 혹시 걸리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 그 서스펜스 자체를 맛보려는 모험심으로 사춘기 시절 영화관을 찾았다고 했다. 소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쓴 안정효씨도 학창 시절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정학을 두 번 받았다. 고2에 정학받았을 때 본 영화는 '풍운의 젠다성'이라는 청소년 고전영화였으니 억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늘날엔 예전 같은 교외 학생 생활 지도는 없다. 지도교사가 공포의 존재가 아니라 학생이 공포의 존재가 되는 수도 많다. 19금 영화만 아니라면 학생이 극장에서 무제한으로 영화를 봐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청소년 영화를 보러 갔다가 '극장 출입죄'로 정학을 당하던 이야기는 믿기 힘든 전설처럼 들리게 됐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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