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6] 파월 장병 첫 번째 樂 '여고생 펜팔'… 1970년대 펜팔업체는 '짝짓기' 전문
1972년 1월 28일 오전 서울 어느 다방에서 폭발물이 터져 아수라장이 됐다.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현역 군인이 애인의 이별 통보에 분노해 저지른 짓이었다. 군인은 베트남 참전 시절 몇 년간 편지를 나누다 '장래'까지 약속했던 여성을 귀국 후 처음 대면했으나, 얼마 못 가 여자가 연락을 끊자 일을 저질렀다. 여성은 실제 만나본 남자가 편지에서 밝혔던 멋진 모습과는 너무 다르자 배신감을 못 이겨 떠난 것이었다(조선일보 1972년 1월 29일자). 1960년대 초부터 20여년간 국민적 붐을 이뤘던 '펜팔(pen pal)'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생면부지인 사람끼리 편지로만 소통하며 친해지는 펜팔 유행은 1960년대에 급속히 번졌다. 그 인구가 금세 30만명을 넘어섰다. 붐을 확산시킨 건 국군의 베트남 참전이었다. 1964~1973년의 파병 시기에 머나먼 전쟁터의 국군들에게 펜팔은 첫 번째 위안이었다. 물론 여학생들 편지일 때 그랬다. 1967년 한 파월 용사는 신문 좌담회에서 "'바지씨(氏)'보다는 '치마씨'가 보내준 사연이 나긋나긋하고 정다워 좋다"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어느 용사는 180여명과 편지를 나눴다. 당시 여학생들의 펜팔 상대 1위는 파월 장병, 2위는 시내 남학생들이었다. 어느 여고는 전교생 2600명 중 900여명이 펜팔을 했다. 맹호부대는 '펜팔 미인 선발 대회'까지 열었다. 펜팔 여성 사진들을 늘어놓고 심사해 진·선·미로 뽑힌 미인들에겐 국제 우편을 통해 선물도 보냈다(조선일보 1966년 8월 9일자). 장병들과 여고생들 사이의 편지는 가끔 '위문편지'와 '러브레터' 사이를 줄타기했다. 1970년대 들어선 아예 펜팔이 남녀 교제 수단인 것처럼 변질됐다. 중개업체들이 등장해 여러 남녀의 신청을 받은 뒤 '진실한 이성'을 연결시켜 준다고 광고했다. 한 업체는 남성 신청자들에게 '원하는 여성'의 타입을 '객관식'으로 골라 적어내게 했다. 즉, 원하는 성격은 ▲온순 ▲명랑 ▲침착 ▲낭만 ▲청순 중에서, 취미는 ▲수예 ▲음악 감상 ▲등산 ▲탁구 ▲문예 ▲영화 감상 중 하나를 고르도록 한 점이 이채롭다. "몇 번씩이나 썼다 지웠다 하다가 용기 내어 편지 올립니다…"라고 시작한 편지를 띄운 남자들은 여자의 답장이 올 때까지 며칠간 집배원만 나타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펜팔로 운명의 상대를 만나 결혼하는 일도 없지는 않았다. 1970년대 중반, 한글 이름이 서로 같은 게 인연이 돼 펜팔을 시작했다가 결혼한 두 '이현용'씨는 30여년간 동명(同名) 부부로 살면서 불편이 적지 않았지만 개명은 생각도 안 했다. "우릴 만나게 해 준 이름인데 어떻게 바꿔요…"라고 아내는 말했다(조선일보 2005년 3월 21일자). 하지만 편지만 나누는 불완전한 사랑이 결실을 볼 가능성은 낮다. 그런데도 남녀가 만날 기회가 적었던 시절, 숱한 이가 펜팔에 매달렸다. 요즘 인기 있다는 스마트폰의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은 펜팔과 닮은 점이 있어 흥미롭다. 간단한 프로필만 보고 이성을 골라 쪽지를 띄워 소통을 시작한다고 한다. '조건'만 따지는 결혼정보업체식 짝짓기가 진부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이용하기도 한다. 펜팔 전성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미지의 상대에게 메시지를 띄워 보려는 사람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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