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22] 국회에 '콧수염 의원 친목 모임' 탄생… 박정희 대통령 "로마, 수염 탓에 망해"
1964년 6월 중순, 국회에 별난 '의원 친목 모임'이 생겼다. 이름은 '머스태쉬(mustache) 클럽'. 말 그대로 콧수염 기른 의원들의 모임이다. 박한상, 민영남 등 두 야당 의원이 발의했으며, 이효상 국회의장을 비롯해 김성곤, 유진산, 전진한, 정명섭, 유홍, 진기배 의원 등 9명이 회원이었다. 조선시대 고관은 물론이고 구한말 정치인도 콧수염, 턱수염을 길러 위엄을 과시했다. 하지만 1960년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권위를 내세우려고 콧수염을 길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성을 살려 멋 부려 보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머스태쉬 클럽의 정명섭 의원은 "과거 노인들이 권위를 위해 길렀던 것과는 달리 심미적인 면을 추구하기 위해 수염을 기른다"고 밝혔다(경향신문 1964년 7월 11일자). '심미적 면'을 추구한다는 콧수염 의원의 취향이란, 근대화를 향한 전진을 외치던 권위주의 정권의 기질과는 아무래도 덜 어울려 보였다. 머스태쉬 클럽 회원 9명 중 7명이 야당 의원인 것이나, 클럽의 6월 모임에 야당 의원들만 참석한 것도 모두 우연은 아닌 듯했다. 여당 의원이면서 이 클럽에 가입했던 김성곤 의원의 콧수염은 1971년 '10·2 항명 파동' 때 권력으로부터 호된 수난을 당했다. 당시 야당이 제출한 내무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 때 여당 의원 상당수가 '반란표'를 찍는 바람에 해임안이 통과되는 충격적 사태가 터졌고, 김성곤 의원은 반란 주동 4인방 중 하나로 지목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격노했고 김성곤 의원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콧수염을 뽑힌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염 기르기에 대한 거부감을 가끔 드러냈다. 1975년 12월 26일 국무회의에서는 대마초, 장발 등 '불건전 요인'의 제거를 강력 지시하면서 '로마의 멸망' 이야기를 꺼냈다. 박 대통령은 로마제국이 망한 것도 '수염을 지나치게 기르는가 하면 정치인이 목욕탕에서 정치를 하는 등의 이상 풍조'와 관련 있다고 말했다(조선일보 1975년 12월 27일자). 이보다 앞서 1968년 4월 28일 박 대통령은 충무공 탄신 제례를 위해 현충사를 찾았다가 옛 군복을 입고 수염을 단 수문장을 보고는 "내년부터는 3군 현역병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산업화 시대에 수염 기르기란 비생산적이거나 퇴폐적인 치장으로 눈총을 받았다. '쎄시봉 스타'인 가수 이장희는 콧수염 기른 죄로 TV 출연조차 못했다. 이장희가 영화 '한잔의 추억'에 캐스팅됐을 때도 영화사는 "콧수염을 깎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장희는 "차라리 출연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당시 대중 매체에서도 수염 기른 스타일을 종종 깎아내렸다. 1977년 내한한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인터뷰한 작가 최인호는 '수염 기른 파바로티는 성악가라기보다는 질 좋은 정육을 파는 푸줏간 주인' 같다고 썼다.
현대사의 수염 논란에는 취향의 문제뿐 아니라 세계관, 인생관까지 끼어들었다. 최근 수염 기른 기장을 업무에서 배제한 항공사에 대해 법원이 '정당하다'고 판결한 것을 놓고 찬반 여론이 뜨겁게 맞선 것도 수염 문제가 그만큼 명쾌하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것임을 환기시켜 준다. 분명한 것은 취향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쪽으로 거대한 물결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 세기 전 한국인은 김흥국, 박상민 같은 콧수염 가수가 TV 화면을 누비고, 경찰관이 콧수염을 길러도 문제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오는 시대가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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