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24] 극장서 애국가… 관객들 '기립' 20년… 가장 난감했던 건 '에로 영화' 관객들
1971년 3월 14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20세 남자 관객이 경찰에 연행돼 즉심에 회부됐다. 그의 죄는 본영화 상영 전 애국가 영화가 시작됐는데도 일어서지 않고 담배까지 피운 것이었다. 그해 3월 초부터 전국 모든 극장에서 애국가를 틀도록 의무화한 뒤 내려진 관객 처벌 1호였다. 당시 정부는 "애국심 고취를 위해 모든 극장과 공연장에서 애국가 영화를 상영한다"고 발표했다. 이보다 앞서 애국가 영화는 1967년에 극장에서 시범적으로 상영됐다. 서울시내 4개 대형 극장에서 국경일과 기념일에만 틀었다. 관객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무궁화가 만발한 스크린을 그냥 지켜봤다. 껌 씹으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1971년에는 애국가 영화를 모든 영화관에서 매일, 매회 트는 것으로 확대됐다. 이때 정부는 "관객들은 일어나 경의를 표해달라"고 했다. 극장 영화 보기 전 1분 30초씩 '일동 기립'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애국가 상영 때 '앉은 채 듣자'가 61%로 '기립하자'(35%)는 의견보다 훨씬 많았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야당은 "정권이 국민 애국심을 고취시켜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 이득을 보려 한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휴식을 취하고 즐기러 가서까지도 애국심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립을 강요당하여야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사설을 통해 비판했다(조선일보 1971년 3월 7일자).
여러 비판에도 꿈쩍 않고 영화관의 애국가 상영은 근 20년간 이어졌다. 행위예술가 무세중은 그 시절 어느 공연 시작 전 객석에 가득 앉은 관객들을 공연장 밖 로비로 잠시 내보낸 뒤, 텅 빈 객석에 대고 애국가를 틀었다. 이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현 같았다. 코미디 같은 풍경은 '19금 영화' 상영관에서 펼쳐졌다. 1970년대를 풍미한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등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는 물론이고 80년대에 붐을 이룬 '애마부인' 시리즈나 '어우동' '뽕' '변강쇠' 같은 '에로 영화' 개봉관에서도 울려 퍼진 애국가는 관객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며 엄숙하게 일어났다가 앉은 직후 벌거벗은 육체들이 뒤엉킨 스크린을 보는 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었다. 이건 오히려 애국가에 대한 모독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당시 우리처럼 극장에서 애국가를 틀던 대만에서는 1988년 '도색 영화 상영 전의 애국가'가 법정에서까지 논란이 됐다. 대만 법원은 그해 9월 14일 도색 영화 상영 전의 애국가 상영이 애국가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극장의 애국가 상영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동아일보 1988년 9월 16일자). 이 판결에 영향받았는지는 몰라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88년 말 문화공보부는 "1989년부터 극장의 애국가 상영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그렇게 사라진 줄 알았던 '영화관의 애국가'가 최근 다시 울려 퍼졌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의 개봉을 알리는 국내용 예고 영상의 첫머리에 애국가가 잠깐 들어가 객석을 놀라게 했다. 일부 네티즌은 '국뽕(자기 나라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행태)'이니 '헬조선'이니 하는 표현까지 쓰며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영화관에서 하루 대여섯 번씩 애국가를 틀었던 것도 난센스 같은 일이지만, 애국가가 못 들을 노래라도 되는 듯 거부감을 표하는 태도 역시 당혹스럽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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