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26] 아파트 윗집 절구 소리도 참던 시절… 못 견딘 소음은 부부싸움·고성방가
1974년 일본 도쿄 남쪽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의 한 아파트에서 터진 살인 사건은 층간소음 분쟁이 빚어낸 가장 끔찍한 참극으로 꼽힌다. 밤늦도록 들려오는 이웃집 피아노 소리를 못 참던 47세 남자는 그 집을 찾아가 주부 등 3명을 둔기로 내리쳐 살해했다. 일본 매스컴은 '피아노 살인'이라고 명명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당시 국내 신문에선 이 뉴스가 보이지 않는다. 3년 뒤인 1977년 이 범인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혹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으면 옆 감방의 소음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며 항소를 포기했다는 소식만이 국내 일부 신문에 지각 보도됐을 뿐이다. 이 사건은 '층간소음 살인'이 일어나는 오늘의 한국에선 가끔 인용·반추되지만 40년 전엔 이해하기 힘든 '황당 살인극' 정도로 보였는지 모른다.
남의 집 천장을 우리 집 바닥 삼아 사는 아파트 시대가 반세기 가까이 되어가는데, 층간소음 분쟁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층간소음'이란 단어 자체가 신문에 등장한 게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 이전 매스컴도 아파트 소음 공해를 간혹 다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오늘과 양상이 달랐다. 우선 그 시절엔 이웃이 내는 소음보다 자동차 경적 소리 등 외부의 소음이 문제였다. 윗집, 옆집이 내는 소음을 괴로워하는 일이 없지 않았지만, 부부 싸움이나 잔칫집 고성방가 등 특별한 소란을 주로 문제 삼았다. 발자국 소리, 의자 끄는 소리 등 일상 소음에 짜증이 난다는 말은 신문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옛날 아이들이 얌전했던 것도 아니고 아파트 방음 능력이 더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던 습관 그대로 아파트 거실에 팽이를 쿵 던져 돌리고, 딱딱딱 구슬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웬만한 일상 소음은 참으며 살았다. 명절 준비하느라 밤늦도록 쿵쿵 찧던 절구질 소리나 다듬잇돌 두드리는 소리까지도 그냥 넘어갔다. 인내의 한계가 조금 컸던 듯하다. 서울시가 1977년 주민들에게 공지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모든 아파트 단지에 옥외방송용 확성기를 설치토록 결정했던 시대였다. 아파트 6층에 자리 잡은 교회가 찬송가·손뼉 소리 등을 요란하게 내고 밴드 연주까지 해도 주민들은 2년이나 지난 뒤에야 경찰에 진정했다(조선일보 1974년 6월 4일자). 1976년 한밤 피아노 소리를 냈다가 아파트 주민들 신고로 벌금을 문 주부는 사과를 하는 대신 "방음 장치를 하고 쳤는데 고발까지 할 게 뭐 있느냐"라며 이웃 인심부터 탓했다.
오늘날 층간소음 분쟁은 계속 악화하고 있다. 며칠 전엔 위층의 60대 여성이 아래층의 30대에게 살해됐다. 문제는 소음 크기가 아니라 '나의 항의를 왜 무시하느냐'는 감정적 충돌인 경우가 많다. 이번 사건 범인도 "조용히 해 달라는 내 말을 무시해서 분노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1979년 기찻길 옆 두 집 사이에 벌어진 피아노 소음 소송에서도 그런 측면이 읽힌다. "열차가 지나다니는 소리를 늘 들어서 소음에 익숙해져 있을 텐데, 피아노 소리 정도 가지고 뭘 그러느냐"는 법정 질문에 피해자는 이렇게 답했다. "소음을 못 참은 게 아니라 남에게 괴로움을 끼치고서도 모른 체하는 무신경을 참을 수 없었다." 층간소음 분쟁 해결의 핵심은 음량의 축소가 아니라 사람 간 소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1970년대의 사례가 이미 보여주고 있다.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 [27] 기고만장 옛 흥신소, 검사까지 미행 "뒤쫓다 들키면 취한 척하라" 지침도
1964년 가을 어느 날, 서울지검의 모 검사는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낯선 지프를 탄 사내들이 출퇴근 시간은 물론 점심 시간까지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감시했다. 분노한 검사가 괴청년들을 유인해 붙잡고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은 흥신소 직원이었다. 미행을 의뢰한 사람은 이 검사가 수사 중인 사건의 피의자였다. 검사의 여자 관계 등 사생활 약점을 캐내 협박하려던 것이었다. 검사는 이 사실을 즉각 상부에 보고했고, 곧바로 검찰은 흥신소 전면 수사를 벌여 탈법에 철퇴를 내리쳤다. 당시 서울의 전체 흥신소 9곳 중 3곳의 대표가 구속됐다. 조선일보는 '호랑이 쫓던 하룻강아지'가 혼쭐났다고 표현했다. 검사의 약점을 잡으려던 피의자의 간도 컸지만 검사 미행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건 흥신소들이 얼마나 겁이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검찰이 흥신소 장부들을 들춰보니 반 이상이 사생활 침해였다. 이들이 미행한 대상 중엔 명문대 교수, 농림부 과장, 국회경호대 직원도 있었다.
흥신소 탈선 영업의 역사는 뿌리가 의외로 깊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의 조선일보 지면에 이미 흥신소 비리가 고발돼 있다. '악(惡)수단을 농하는 탐정사'라는 기사는 "흥신소들이 무뢰배를 두어 각 가정에서 이러나는 문뎨를 엿보아 가지고, 혹은 협박 혹은 공갈을 하야 금품을 사취한다"고 보도했다(조선일보 1925년 11월 20일자). 협박·갈취는 흥신소 탈법 활동의 고전적 메뉴다. 1970년대 어느 흥신소는 예비 신부 측 부탁을 받고 예비 신랑의 뒷조사를 하다가 신랑이 기생집에서 노는 장면 등 300여 장의 사진을 찍은 뒤 신부 측으로부터 보수를 받는 대신 신랑 쪽을 협박해 그 몇 십배 돈을 뜯어냈다. 흥신소의 탈법에 대한 당국의 경고와 단죄는 일일이 꼽기도 힘들 만큼 반복됐다. 하지만 흥신소의 주된 시장은 늘 사생활 불법 조사였다. 때론 흥신소가 권력과 묘한 공생 관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자유당 시절 일부 정치인은 흥신소를 통해 정적의 비리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1962년엔 일부 경찰관이 수사 활동에 흥신소 직원들을 이용했다가 상부의 경고를 받았다. 일부 흥신소 직원은 경찰관 사칭도 서슴지 않았다. 1973년 적발된 어느 흥신소엔 수사기관 뺨치는 '미행 시 복무 지침'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상대를 미행하다 골목에서 마주쳐 탄로 날 듯하면 술 취한 척하라 ▲집 안 구조를 확인하려면 돌로 유리창을 깬 후 사람이 뛰쳐나올 때를 틈타 문틈으로 들여다봐라 ▲옷은 단정하면서 변장하기 쉬운 것으로 입으라는 내용 등이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흥신소가 요즘 다시 '호시절'을 만났다고 한다. 지난 4일 경찰은 흥신소가 종전의 2배인 3000여 곳으로 늘어 성업 중이라고 밝혔다. 간통죄가 폐지돼 경찰이 불륜 현장에 개입하는 일이 사라지자, 이혼 소송 때 제시할 상대의 불륜 증거를 직접 확보하려는 사람들이 급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참에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에게 민간조사원 자격을 주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민간인에게 준 수사관 자격을 준다는 게 어떤 위험 부담을 안기는지는 역사가 보여 주고 있으니 신중히 판단할 문제다. '내게 상처준 자를 쓰러뜨릴 약점을 어떻게든 잡고 싶다'는 의뢰인들의 행렬이 한 세기가 되도록 그치지 않는 이상, 사생활에 관한 불법 뒷조사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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