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18,19,20]누락분

by 까망잉크 2023. 3. 4.

[김명환의 시간여행] [18] 결혼식 답례품·피로연 금지되자 성냥갑 속 지폐 넣은 '답례금' 등장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5.11 03:00업데이트 2020.07.24 01:15
 

1964년 어느 국립 연구기관장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답례품으로 인스턴트 라면 묶음을 받았다. 식사 따로, 답례품 따로 제공하는 오늘의 결혼식과 달리 라면이 '답례'의 전부였다. 피로연을 생략하고 간소한 답례품으로 대신하는 결혼 문화는 전후(戰後)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 싹터 20년 가까이 이어졌다. 인기 1위의 답례품은 찹쌀떡이었다. 우리 전통 떡이 아니라 '앙꼬(팥소)'를 듬뿍 넣은 일본식 '모찌'였다. 부부 사이가 찰떡같기를 바라는 뜻이 담겼다. 1960~70년대에 서울 시내 유명 떡집 수십 곳은 답례품 전문 가게로 큰돈을 만졌다. 결혼식장 축의금 접수부에선 봉투 하나에 답례품 한 개씩 줬다. 먹을 게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는 사람도 꽤 있었다. 떡이나 카스텔라를 많이 받으려고 온 가족이 동원돼 빈 편지 봉투 하나씩을 냈던, 웃지 못할 풍경도 빚어졌다. 이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답례품을 슬쩍하는 전문 절도범은 골칫거리였다. '케이크 부대'라고 불린 이들은 하객으로 가장해 여러 결혼식장을 돌며 비누, 수건, 찹쌀떡 등을 최대한 받아낸 뒤 시장에 팔아넘겼다. 1972년 봄엔 저명인사 결혼식장만 찾아다니며 값비싼 답례품을 훔쳐 팔아온 30~40대 남녀 16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붙잡혔다(조선일보 1972년 3월 10일 자).

하객들에게 증정할 답례품 박스들이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1960년대 결혼식장의 풍경. 오른쪽 사진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답례품이었던 찹쌀떡.

답례품 시대는 1969년 일단 막을 내린다. 정부는 '가정의례준칙'을 공포해 청첩장, 답례품, 피로연을 모두 금지했다. '10월 유신' 이듬해인 1973년엔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까지 만들어 더 강하게 규제했다. 청첩장, 답례품을 주다 걸리면 처벌했다. 한동안 결혼식 하객은 축의금 봉투만 내밀고 빈손으로 그냥 돌아가야 했다. 하객들 사이에선 "가는 정만 있고 오는 정은 없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떤 신랑은 미안했던지 돌아가는 하객들에게 멋쩍게 절을 하기도 했다.

결국 편법이 고개를 내밀었다. 상당수 결혼식에선 하객에게 일일이 귓속말로 "어디 어디 식당으로 오세요"라고 피로연을 알렸다. 청첩장 역시 '청첩'이란 말만 쏙 빼고 '알립니다' 혹은 '모시는 글' 등의 제목으로 결혼식 내용을 적어 보통 편지처럼 전하는 집이 늘어갔다. 당국도 1980년부터는 결혼식 하객에 대한 간단한 음식 접대는 묵인하기 시작한다. 대중음식점의 '갈비탕 피로연'이 이 무렵 보편화된다. 답례품은 여전히 규제했지만 단속을 피하려고 성냥갑 속에 천 원짜리 지폐를 넣어 '답례금'으로 주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법 따로 현실 따로'의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건 헌법재판소의 결정이었다. 헌재는 1998년 10월 피로연, 답례품 등의 금지가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배치된다며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지난 반세기 동안 결혼식 답례품은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오늘날에도 답례품이 있지만 식사 대접 대신 주는 물건은 아니다. 신랑·신부는 다양한 답례품으로 개성을 뽐낸다. 최근 결혼 답례품 인기 순위를 조사했더니 마카롱, 수제 쿠키, 더치커피 등 서구식 디저트들이 수위를 차지했다. 최고로 꼽혔던 떡은 순위에 들지도 못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답례품 절도다. 지난달 30일 대구의 어느 결혼식장에서는 하객에게 줄 답례품 향초 100여 개가 도난 당했다.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 [19] "反사회적 유흥" 고고춤 전면금지령… 춤추던 대학생 84명 무더기 연행도...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5.18 03:00업데이트 2020.07.24 00:26
 

10월유신 단행 5일 전인 1972년 10월 12일 오후, 서울시청에 나이트클럽· 카바레 '사장님'들 60여 명이 불려왔다. 양택식 시장은 "오늘부터 시내 전 유흥업소에서 고고음악 연주와 고고춤 추는 행위를 금한다"고 '지시'했다. 시는 이런 내용의 공한(公翰)도 전 업소에 발송했다. 금지 이유는 '선정적 음악으로 퇴폐적 풍조를 조성케 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국은 업주들에게 '불응하면 영업 정지'라는 으름장도 놓았다. 공권력이 특정한 음악과 춤을 적시해 전면 금지한 것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조선일보 1972년 10월 13일 자) 1970년 말 조선호텔 고고클럽 등장 이후 불붙고 있던 고고클럽 붐은 철퇴를 맞고 얼어붙었다.

초창기 고고클럽의 풍경을 담은 신문 사진.(조선일보 1971년 3월 14일 자) 오른쪽 사진은 서울시가 전 유흥업소에 내린 ‘고고춤 금지령’을 대서특필한 기사.(조선일보 1972년 10월 13일 자)

1965년경 상륙한 고고춤은 삽시간에 청년들을 사로잡았지만, '퇴폐풍조'라는 사회적 비난을 바가지로 뒤집어썼다. 이 춤은 정해진 스텝이 따로 없어 촌스럽기 짝없는 막춤에 가까운데도, 기성세대와 언론은 고고춤과 고고클럽을 난타했다. 어떤 춤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컴컴한 실내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몸을 흔든다는 것 자체가 거부감을 준 것이다. 신문엔 고고 클럽에 관한 최악의 표현들이 난무했다. '환각 조명 속 지옥 같은 풍경'에서 '여자로 착각되는 긴 머리털'의 '미친 사람들'이 '춤을 춘다기보다 광란한다'고 묘사했다. 당시 고고클럽 현장 취재 기사에서 고고장 웨이트리스는 '남자손님들 대부분은 부유한 가정의 빗나간 대학생이거나 재수생과 젊은 회사원, 삼류 연예인 등'이며 여자는 '별로 질이 좋지 않은 층이 많다'고 말했다. 기사는 '춤추다 땀으로 젖은 손님들은 싸움터에서 돌아온 부상병 같다'고 표현했다. 처녀들이 고고클럽에 갔더니 웨이터가 '좋은 자리가 있다'며 남자들과 합석시켜 주는 풍경을 묘사하며 '이처럼 남녀가 만나는 것은 웨이터가 중개인'이라는 대목도 보인다. 이른바 나이트클럽의 '부킹(즉석 만남)'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신문의 논설은 "최신 인플루엔자 같은 것이 한국의 젊은이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반사회적 유흥이 왜 묵인돼야 하는가"라고 꾸짖었다. 비판여론을 업고 당국은 공권력을 총동원해 고고춤을 싹쓸이하려 했다. 1972년 고고 금지령 다음 날 당국은 전 유흥업소 일제 단속을 벌여, 무려 12만1000명을 단속하고 '퇴폐업소' 233곳을 행정처분 했다. 1973년 10월엔 다방을 전세 내 고고춤을 추며 동창회를 하던 대학생 84명 전원을 경찰이 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고 열풍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서울의 고고클럽을 단속했더니 고고족들이 인천 등으로 지방원정을 가는 '풍선효과'도 나타났다. 심야영업을 금하자 클럽들은 셔터를 내리고 몰래 철야영업했다. 결국 고고춤 유행은 제 수명을 다하고 1978년쯤부터 디스코와 바통 터치했다.

오늘 대한민국의 밤문화는 그때 그 공권력의 서슬퍼런 댄스 금지령이 무색할 정도가 됐다. 지난 1월 3당대표와 관계 장관들이 참석한 '중·장기 경제 어젠다 추진 전략회의'에선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 강남의 나이트클럽을 관광명소로 육성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논의도 있었다. 지난 어버이날 서울 어느 구청의 사회복지관이 개최한 '어르신 효 축제'에서 노인 600여 명이 열광적으로 춤을 춘 곳은 다름 아닌 나이트클럽이었다.

 

[김명환의 시간여행] [20] '건전가요' 아닌 노래 트는 택시 단속… 발라드 음반에 '淨化의 노래' 삽입도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5.25 03:00업데이트 2020.07.23 23:34
 
"모든 버스와 택시에서는 '새마을 노래' 등 건전한 음악만 방송하도록 지도하라." 1974년 8월 5일 교통부가 시·도에 내린 특별 지시다. 교통부는 '대중교통 수단이 퇴폐적 저속가요 등을 요란스럽게 차내에 방송해 손님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며 '암행 단속을 실시해 적발되면 행정처분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경향신문 1974년 8월 5일자). 운전기사가 구슬픈 트로트라도 틀다가 걸리면 혼쭐이 날 판이었다. 제3공화국 시절의 건전가요 '권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 실감하게 한다. 이 무렵 서울의 한 경찰서는 유치장에 종일 건전가요를 틀었다. 이 아이디어를 냈다는 서장은 '응어리진 유치인들 가슴을 풀어 참다운 인간으로 개조시키려는 목적'이라고 밝혔다(조선일보 1976년 11월 3일자).
1970년대에 정부 주도로 제작된‘건전가요’음반들.‘ 싸우면서 건설하자’‘방첩의 노래’등의 노래를 학교·공공 기관에서 틀도록 했다.

정부 주도로 건전가요가 만들어진 건 1957년쯤부터다. 1970년대 들어선 새마을운동과 발맞춰 더 강력하게 권장된다. 문공부는 1972년 '명랑한 사회 분위기를 이룩하기 위해' 건전가요 122편을 제정하고 범국민적 개창 운동을 폈다. 반공, 건설, 충효 등 정부가 외치는 이념과 가치를 담은 노래만 부르고 들으라는 이야기였다. 사랑 노래가 대부분인 가요는 '저속·퇴폐'로 몰렸다. 1975년엔 '아침이슬' '물좀 주소'등 숱한 노래가 금지곡이 됐다. 건전가요와 금지곡은 '노래 통제 정책'이라는 동전 하나의 양면이었다.

1980년대 들어선 가요 음반마다 건전가요를 의무적으로 넣어야 하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됐다. 음반협회가 사회정화위원회 등의 '협조' 요청에 응해 자율적으로 넣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진짜 자율적으로 건전가요를 안 넣고도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심의를 통과할 수 있다고 여긴 대중음악인은 아무도 없었다. 의무를 이행하는 방식도 갖가지였다. 상당수 음반은 해당 가수와 무관한 가수의 건전가요를 아무 곡이나 끼워넣었다.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유재하의 유일한 앨범에도 명곡 '사랑하기 때문에'의 다음 순서엔 '열리는 새 시대의 힘찬 발걸음 / 거리마다 직장마다 정화의 물결'이라는 '정화의 노래'가 들어갔다. 난감한 일이었다. 어떤 가수는 건전가요조차도 본인이 스스로 불렀다. 어차피 들어가야 한다면 자기 목소리로 넣는 게 차선이라 여긴 것이다. 조용필도 1987년 9집 앨범 끝에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이라며 군가 '진짜사나이'를 불러 수록했다. '들국화'가 1집 마지막 트랙에 건전가요로 녹음한 '우리의 소원'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수라가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렀다'는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은 그녀의 다른 노래를 제치고 대히트해 대표곡이 됐다. 하지만 비상식적 제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86년 조선일보는 '사람들이 안 듣는 건전가요는 실효성 없는 끼워 팔기'라고 지적했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988년 말부터 건전가요가 가요 음반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사연 많던 '건전가요'란 단어가 최근 외신 보도에 등장했다. 지난 14일 스웨덴에서 열린 '2016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옛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소수민족의 참상을 노래한 저항가요가 우승하자 러시아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선 '건전가요의 축제가 되어야 할 유로비전이 변질됐다'고 비난했다. 어떤 집단의 정치적 입맛에 맞는 노래에 붙이는 수식어가 '건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