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109] 봄은 고양이로다
입력 2023.02.27 00:00업데이트 2023.02.27 00:02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1900~1929)
![](https://blog.kakaocdn.net/dn/luT73/btr16i5AiXc/O2mozSMPkQ5MKYKaMRdpR0/img.jpg)
봄의 향기를 고양이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 시, 1920년대에도 이장희처럼 이미지로만 시를 쓴 시인이 있었다. 이 시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호동그란’이다. 호기심 많고 동그란 고양이의 눈이 금방 떠오르지 않나.
100여 년 전 이토록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시를 쓴 시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장희의 출생 연도 ‘1900년’ 옆에 붙은 ‘고종 37′을 보니 그가 살아낸 시대의 무게가 실감난다.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살다 29세에 요절한 시인.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교토중학교를 졸업한 뒤 소수의 문인들과 교류하다 자신의 집에서 음독 자살했다. 윤동주처럼 일제의 감옥에서 사망한 시인들 못지않게 이장희의 마지막이 안타깝다.
훗날 그를 기릴 이렇다 할 명분도 없이 세상을 버린 사람. 오래 살고 인맥이 넓어야 문단에서 기억되는데… 그러나 그는 겨레가 두고두고 음미할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의 ‘고양이’가 아무개가 토해낸 만여 편의 시보다 내겐 더 값지다.
조선일보
'시와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사진 찍다 (3) | 2023.03.10 |
---|---|
늦게 오는 사람 (0) | 2023.03.06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2) | 2023.02.20 |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0) | 2023.02.19 |
동요풍의 한시[이준식의 한시 한 수] (0) | 2023.02.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