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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늦게 오는 사람

by 까망잉크 2023. 3. 6.

늦게 오는 사람

입력 : 2023.02.13 03:00 수정 : 2023.02.14 10:44
김정수 시인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이잠(1969~)

시인은 “오 촉짜리 전구”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밝기라 한다. 와트(W)보다 더 친숙하게 사용한 ‘촉’은 촛불 하나의 밝기를 표시하는 단위로, 5촉이면 촛불 다섯 개를 켜놓은 밝기다. 가정에서 주로 사용한 30촉 백열전구에 비하면 상당히 어두운 편이다. 한데 50대인 시인에게 중요한 건 밝고 어두움이 아니라 ‘늦게 오는’이라는 시간성이다. “뜨거워서 데일” 것 같은 청춘의 사랑보다 늦게 온 “순한 사람”과 소소한 집안일을 함께하면서 늙어가고 싶은 바람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은 남에게 잘 속는다. 하여 자주 눈물 흘리고, 상처를 많이 받는다. 스스로 “어리숙한 사람”이라는 시인은 이제 누군가에게 기대 살고 싶은 심경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찾아오면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집에 들이려 한다. 왠지 낯선 사람이 아니라 부평초처럼 떠돌다 돌아온 사람 같다. 용서하려는 마음도 엿보인다. 모든 걸 잊고 “이별 없는” 사랑을 하다가 백열전구처럼 사라지고 싶은 소망을 내비친다.

경향신문

늦게, 오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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