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21) 쓸쓸한 귀향
입력 2020. 11. 19. 18: 38
![](https://blog.kakaocdn.net/dn/d4bG6e/btsdlrDJvja/m0wyDdI6KqOJqmFH7Y2kfK/img.jpg)
그림/이미애(단국대 예술대학 졸업)
넋 나간 듯 마루에 잠시 서서 한손으로 기둥을 짚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이 냉혈 찬 인간이 삼천 냥이나 되는 돈을 꿀꺽 받아 삼켜먹고는 간다는 사람 붙잡기는커녕 노자 돈 한 푼 챙겨 주지 않으니 참으로 기가 막혀 정말로 그 자리에 꺼꾸러져 죽어야만 옳을 지경이었다.
김선비는 순간 두 주먹을 힘껏 부르쥐었다.
“내 저 자를 당장에!……”
김선비는 그렇게 성난 범처럼 낮게 웅얼거리며 이정승의 방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가까스로 움켜잡고 사랑방으로 간 그날 아침 김선비는 정말 빈털터리 맨몸으로 달랑 자신의 짐을 챙겨 등에 짊어지고 길을 나서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함께 살던 사랑방 식객 선비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선 몸, 다시 돌아가 노자라도 몇 푼 챙겨달라고 이정승에게 자존심상 도무지 말할 수도 없었고, 또 노자가 없어서 고향에 못 가겠노라고 다시 사랑방에 눌러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김선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딱한 처지를 한탄하며 끓는 울분을 속으로 잘근잘근 씹어 삼키면서 우직하게도 정말로 노자 한 푼 없이 고향을 향해 터벅터벅 발길을 놓는 것이었다.
걸식을 하면서라도 오직 걸어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마음 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피눈물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길에 무슨 일이 닥칠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때는 춘삼월 멀리 달아났던 남풍이 훈풍을 몰고 돌아와 찬바람 삭막한 눈 덮인 들을 녹여 푸른 풀잎들 무성하게 돋아나는 꽃피는 시절이었다.
겨울바람 따라 왔던 겨울 철새들도 다시 물러가는 차가운 겨울바람 따라 물러나고 그 자리에 여름 철새들이 봄꽃 향기를 따라 와 즐겁게 노래했다.
살구꽃, 복숭아꽃, 자두 꽃 등 각종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들에 민들레꽃 산에 진달래꽃 피는 봄은 역시 생명이 생동하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운 시절 한번 즐기지 못하고 벼슬길이 좋다고 오로지 벼슬자리하나 챙기기 위하여 공부하고 시험보고 또 공부하고 시험보고 그밖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돈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어 보려 하였건만 이렇게 초라한 행색이 되고 만 자신의 지나온 날을 다시금 회상하며 김선비는 눈가에 솟아나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이처럼 작별해야만 하는 낯선 한양 땅의 쓸쓸한 봄 하늘을 황량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김선비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말인가?
이정승이란 저 작자! 별 실력도 없고 욕심만 많은 성정 포악한 사람인데도 오직 예쁜 누이 하나 잘 둔 덕으로 어디에 무슨 복이 저리도 많이 들었는지 높은 자리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고, 실력 좋고 마음씨 선량한 사람은 도무지 되는 것 하나 없이 평생을 고통 속에서 헤매다 살다 가기도 해야 하니 도대체 그 까닭을 알길 없는 것이 이놈 인생사인 것만 같았다. <계속>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22) 나무꾼 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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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미애(단국대 예술대학 졸업)
세상일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그 오묘한 그 무엇이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김선비는 문득 사랑방에서 식객으로 함께 있었던 어느 선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터덜터덜 홀로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풍수지리에 도통한 지관(地官) 도선이 어느 가을날 높은 산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배가 고파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머리가 허옇게 새고 다리근육에 힘이 풀리는 노인의 몸으로 이 산 저 산 산 구경을 재미삼아 다니는 도선도 쇠약해져가는 몸에 더구나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허기가 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아이구! 배도 고프고 힘들다! 예서 좀 쉬었다 가자!”
산 고개를 넘어오던 도선이 기진맥진하여 크게 혼잣말로 소리치며 산마루 아래 개울가에 앉아 지친 두 다리를 잠시 멈추고는 바위위에 턱 걸터앉았다.
눈앞에 들어오는 불붙는 단풍이며 형형색색 물들어 가는 산야가 따가운 가을볕에 하염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쿵쿵 나무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선이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웬 젊은이가 지게를 받쳐 놓고 도끼질을 하며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도끼질을 그만 두더니 도선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는 것을 자세히 보니 머리에 노란 끈 댕기를 묶은 순박하게 생긴 나무꾼총각이 한손에 작은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아이구! 어르신, 많이 시장 하신 모양이시네요. 이 누룽지라도 요기하고 산을 내려가시면 좀 수월하실 겁니다.”
나무꾼 총각이 작은 보자기를 도선 앞으로 쓱 내밀면서 말했다. 누룽지를 싸와서 배고프면 먹으려고 나무위에 걸어 둔 것을 내려다 주는 것이었다.
“어허! 늙은이가 배고프다고 망령이 나서 혼잣소리를 하던 것을 들었던 모양이로구나! 그렇다고 젊은이가 나무하다가 먹으려고 가져 온 것을 나를 주면 어떻게 하느냐?”
도선이 선뜻 내미는 누룽지를 바로 받지 못하고 말했다.
“어르신, 저야 저 아랫동네에 내려가면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염려마시고 드십시오.”
나무꾼 총각이 말했다.
“허허! 그래, 고맙네.”
도선은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배가 고픈 터라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그 누룽지를 받아 맛있게 먹었다.
산 개울물을 마셔가며 누룽지를 다 먹고 난 도선은 한껏 기운이 돋아 힘이 나고 살 것 같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도선이 다시 나무꾼총각을 눈여겨보니 머리에 노란 끈 댕기를 묶은 것이 아무래도 상(喪)을 당한 모양이었다.
“자네 요 근래에 상을 당했는가 보네?” <계속>
출처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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