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3)불행한 선비 <제4화>기생 소백주 (34)술동이
<제4화>기생 소백주 (33)불행한 선비
입력 2020. 12. 08. 17: 42
그림/김리라(성균관대 미술학부 졸업)
소백주는 지난날 매일 밤 어울렸던 고위관리들의 허장성세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가로로 젓는 것이었다.
허명과 허세를 쫓아 살며 온갖 뇌물을 받아 챙기면서 갖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거래와 암약으로 세상을 농단하면서도 자신이 마치 정의로운 위대한 영웅이라도 되는 양 자기보다 못한 직급의 약자나 계집 앞에서 위세를 떠는 위인들을 보면 헛웃음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나오고 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역시나 가소로운 소인배요 졸장부들이었다. 차라리 이런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탐욕 다 벗어버리고 자신의 푸른 정신 하나 지키며 가난하고 옹색하게 살아갈지언정 그 마음만은 비길 데 없이 진실하고 올곧은 사내 하나 바랐건만 역시 그런 사내는 이 나라 안에서는 오래전 씨가 말라버렸단 말인가?
소백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가야금을 꺼내 홀로 가락을 퉁겨가며 외로운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다.
“동지섣달 긴긴밤을 쓸고 가는 찬바람아? 이 내 마음 둘 곳 없어 잠 못 이루는구나. 세상에 사내다운 사내는 없고 흥정만 남았으니? 새 봄이 온다고 한들 이 새밭에 씨 뿌릴 사람 없구나!”
소백주는 가슴 속 시심을 무연히 읊조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차가운 얼음 어는 겨울밤은 외롭게 홀로 기울고 소문을 들은 사내들은 소백주의 미끈한 몸이 탐이 났던지, 재산이 탐이 났던지, 아니면 그 하찮은 기생의 명성이 탐이 났던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소백주는 속으로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들 모두에게 보기 좋게 퇴짜를 꽝꽝 먹여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또 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어냐! 이런 간장 종지 같은 조그만 잔에 어찌 술을 마시란 말이냐!”
그때였다. 바깥이 소란하다 싶더니 커다란 사내의 목소리가 소백주의 쓸쓸한 시흥(詩興)을 찰나에 와락 깨뜨려버리고 귀 고막을 가시처럼 날카롭게 뚫고 들었다. “너의 주인의 마음은 이만큼 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냐! 이놈아! 사람을 어찌 보느냐! 어서 이 잔을 물리고 술을 동이 째로 내 오너라!”
‘어허라! 저게 무슨 소리인가? 누가 이곳에 와서 술잔 시비를 건단 말인가?’ 소백주는 웬 사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갑자기 온 집안이 무너져 내리도록 울려 퍼지자 자신도 모르게 문틈으로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봄꽃 피고 새가 우는 이 봄날 어스름 석양이 몰려드는데 허름하게 차려입은 한 사내가 찾아들어와 쓰라는 시(詩)는 써내지 않고 느닷없이 작은 술잔을 탓하며 술동이 타령을 하다니!
소백주는 첫눈에 저 사내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이 시대의 낙오(落伍)한 불행한 선비임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계속>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4)술동이
그림/김리라(성균관대 미술학부 졸업)
그러나 아무도 아직까지 저 사내처럼 내다주는 간장 종지 같은 술잔을 타박하며 시비를 거는 사내는 없었다. 그저 주면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는 마치 천하의 달필이라도 되는 양 시 한편을 제 멋에 휘갈겨 쓰고는 소백주의 처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필경 저 사내는 시문(詩文)에도 내 처사에도 안중에 없구나!’
문지방 너머로 대청에 앉아있는 사내의 꼴을 살펴본 소백주는 술을 동이 째 가져오라고 소리친다는 집안에서 일하는 아낙의 말을 듣고는 그가 원하는 대로 동이 째 술을 내다주라고 했다. 아낙이 술동이를 가져다주자 그 사내가 술동이를 받아들더니 그것을 안아 들고는 단숨에 벌컥벌컥 그 술을 다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소백주는 제 눈을 의심하며 등불 아래 앉아 있는 사내를 흠칫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과연 저 사내가 어떤 글을 써 올릴 것인가?
소백주가 짐짓 의아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사내는 바로 다름 아닌 김선비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쫄쫄 굶고 수원에 당도한 김선비는 한 끼 끼니를 때울 요량도 하룻밤 잠잘 곳도 없었는데, 소백주의 방을 보고는 한달음에 달려오다 자괴감으로 길 가운데 우뚝 멈춰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허기나 면하고 가자고 마음을 정하고는 달려와서 많이 좀 먹어 보자고 마구 소리쳤던 것이다.
김선비의 마음 속에는 시를 써서 소백주의 마음에 들거나 말거나 그러한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로라는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지위를 가진 문장가들도 다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낙방을 놓는다는데 어찌 김선비의 시가 소백주의 마음에 들 것인가! 김선비는 오직 배고픔이나 면하고 잠시 쉬어가자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쫄쫄 굶은 빈 뱃속으로 동이 째로 벌컥벌컥 술이 들어가고 맛난 편육 한 접시를 안주로 후다닥 쓸어먹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글을 배워 천하의 바른 도를 세우기는커녕 가정도 건사하지 못하고, 한 몸 바로 세우지도 못했으니 이는 사내로서 글을 배웠다고 할 것이 없었다.
뭇 사내들은 글을 배워 과거에 급제해 임금 앞에 나아가 지위와 권력을 하사받고 가정을 일으키고, 문중을 일으키고, 나라의 동량이 되어 한 몸 반듯하게 세워 빛나는 이름을 창공에 높이 띄워 화려한 금의를 두르고 출세하여 호의호식 온갖 영화를 누리며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김선비 자신은 있는 재산마저 다 뇌물로 바쳐 탕진하고 말았으니 어디다 고개를 둘 곳이 없었다.
하루 종일 걸어 노곤한 몸에 술기가 올라와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김선비는 하얀 종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붓 끝에 새까만 먹물을 잔뜩 묻혀 겨누었다.
“급기야는 내 한 끼 허기를 채우기 위하여 한갓 기생 따위의 마음에나 드는 글을 써야 하다니!........추하도다! 추하도다!”
김선비는 내키지 않은지 순간 쩝 입맛을 다시며 붓을 쥔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계속>
출처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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