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5)술값
입력 2020. 12. 10. 18: 50
![](https://blog.kakaocdn.net/dn/eMaHDT/btsdBfbTeRo/VRL6kk3eINPC1kJldAPDF1/img.jpg)
그림/김리라(성균관대 미술학부 졸업)
“으으하하하하핫!”
김선비는 들었던 붓을 순간 사납게 멀리 허공으로 내팽개치며 미친놈같이 한바탕 크게 웃어재끼는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글을 배울 까닭이 없었다. 글을 배운들 과거에 급제하여 오직 호의호식(好衣好食) 일신의 영달이나 추구하는데 써야하고, 백성들을 핍박하고 윽박질러 세금 거둬들이는 데나 써야하고, 임금에게 알랑거리는 데나 써야하고, 상전에게 아첨하고 뇌물 바치는 데나 써야하고, 또 자신처럼 벼슬자리를 흥정하는 데나 써야하는 것을, 더구나 이렇게 기생에게 한잔 술을 빌어먹을 때나 써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모름지기 선비가 글을 배웠으면 백성들을 위한 글을 써야하고, 임금의 실정을 바로잡는 글을 써야하고, 세상의 바른 도(道)와 정의를 세우는데 써야하거늘 이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천하의 웅변가 변론의 천재라 일컫는 유가(儒家)의 성현 맹자(孟子)는 양나라 혜왕이 ‘선생께서 우리나라에 오셨는데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천하의 인의(仁義)를 논하러 왔는데 네놈은 고작 이익을 말하느냐?’며 면전에서 비판했고, 조소(嘲笑)의 천재라 일컫는 도가(道家)의 성현 장자(莊子)는 양나라 혜왕이 부르자 입고 갈 옷이 없어 평소 입던 누더기 옷에 짚신을 신고 갔다.
양 혜왕이 장자의 그 거지 행색의 몰골을 보고 ‘선생께서는 항상 그렇게 굴러다니십니까?’라고 말하자 ‘이것은 내가 시대를 잘못 만나 성군현상(聖君賢相)을 만나지 못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라고 말하며 그것은 ‘네놈이 정치를 잘못하니 내가 이렇게 사는 것 아니겠냐!’고 기발한 비유로 면전에서 비판하지 않았는가!
천하의 권력을 거머쥔 왕 앞에서도 목숨을 생각지 않고 굽힘없이 할 말을 한데다가 왕이 내미는 재상(宰相)자리도 초개처럼 여기고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 그들 성현에 비하면 김선비 자신은 제 손으로 갖다 준 거액의 뇌물을 벼슬자리를 내주지 않으려거든 되돌려달라는 말 한마디도 이정승에게 하지 못하고 말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왕도 아닌 한갓 정승에게 말이다.
김선비는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잠시 대청마루에 저만치 내팽개쳐져서 까만 먹물 짓이겨진 붓을 바라보고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거리며 웃다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던 김선비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그 붓을 다시 벼루로 가져가 단정히 먹물을 잔뜩 묻혀 쓰다듬었다.
“이 땅에 본시 생명 있는 것은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떠나 서로 평등하거늘 어찌 기생이 준 술이라 하여 그 대가(代價)가 없겠는가! 의당 내 먹은 술값은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퍼뜩 이런 생각이 뇌리를 번개같이 스치고 가는 것을 느낀 김선비는 비로소 술기운이 곧바로 머리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바로잡고 단정히 정좌하고 앉아 붓 끝에 떠오르는 맑은 시심(詩心)을 송두리째 싣는 것이었다. <계속>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6)꽃과 바람
![](https://blog.kakaocdn.net/dn/beBABx/btsdzCrzGWf/Qk2GWZYsKEwdLDz24f5mMK/img.jpg)
그림/이미애(단국대 예술대학 졸업)
그것은 기생 소백주에 대한 상호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최대한의 존중과 예우가 우선된 마음의 자세였다.
평생 글공부만 해온 선비가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 돈으로 벼슬을 사려고까지 했으니 갈 데까지 간 타락한 인생임을 김선비 스스로도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한탄했다고 한다면, 소백주에게 한잔 술을 얻어 마시고 그 술값으로 글을 쓰는 행위는 최초로 그 글에 대한 값을 매김 하는 숭고한 행위라는 것을 김선비 스스로가 문득 깊이 자각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결코 기생이니 뭐니 하는 대상을 따지지도 말 것이며, 또 결과에도 연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했다.
김선비는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고는 쓱쓱 한지를 메워가기 시작했다. 마음에서 용틀임하는 감정을 붓 끝에 담아 거침없이 휘갈겨 써 내리는 것이었다.
봄날 새싹이 눈을 비비듯 여름날 홍수가 장대비로 쏟아지듯 가을날 찬바람이 살을 에듯 겨울날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듯 붓끝은 때론 빨랐다가 또 때론 멈추었다가 그 마음속에 떠오르는 산과 강과 하늘과 바람과 물상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이윽고 김선비는 붓을 쓱 거두었다. 그리고는 일하는 아낙을 불렀다.
“여봐라! 술값 여기 있느니라!”
“예에! 나리!”
집안에서 일을 하는 아낙이 달려와 김선비가 주는 글을 받아들고 소백주에게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물끄러미 문틈으로 사내의 꼴을 바라보고 있던 소백주는 하인이 가져오는 글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여느 때 같잖게 떨리는 마음으로 소백주는 김선비가 쓴 글을 손에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멋들어지게 휘갈겨 쓴 글씨의 모양새가 물 흐르듯 유연했다. 어려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수 십 년간 갈고 닦아온 유려한 솜씨였다.
하긴 그런 유려한 글 솜씨를 보인 사내가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그러기에 인간의 인연(因緣)은 까닭 없이 홀연 오는 것이고 또 마음속에 좋고 싫음이 생겨나는 것 또한 제각각이라서 그것은 그야말로 제 마음 내키면 그만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뉘라서 저 소백주의 마음 내키는 뿌리를 알랴! 소백주의 마음 내키는 까닭을 알기만 한다면 그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지어 그 마음에 들면 그만일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소백주 자신도 모르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듯 인연은 봄날 꽃잎에 바람 휘돌아가는 숱한 사연만큼이나 속절없는 것이었기에 그 깊이를 헤아릴 길 없었다.
그런 알 수 없는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사람들은 인연이라고 했고 또 그것을 운명이라고 했던 것이다. 과연 김선비와 소백주는 그런 인간으로서의 진한 인연의 사슬이 어쩌면 둘 사이에 운명처럼 짙게 드리워진 것이었을까? <계속>
출처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이러 저런 아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도일보]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39/40 <제4화>기생 소백주 (39)허망한 수작질 <제4화>기생 소백주 (40)단꿈 (0) | 2023.05.20 |
---|---|
[남도일보]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7)이심전심 <제4화>기생 소백주 (38)유유자적 (0) | 2023.05.18 |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3)불행한 선비 <제4화>기생 소백주 (34)술동이 (0) | 2023.05.16 |
[남도일보]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1)여인의 꿈- <제4화>기생 소백주 (32)사내들 (0) | 2023.05.15 |
[남도일보] 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제4화>기생 소백주 (29)식자우환 (0) | 2023.05.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