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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41] '불온 삐라' 주워 신고 안 했다고 구속… 정부 "경솔하게 남에게 보여주지 말라"

by 까망잉크 2023. 6. 19.

[김명환의 시간여행] [41] '불온 삐라' 주워 신고 안 했다고 구속… 정부 "경솔하게 남에게 보여주지 말라"

김명환 전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10.26. 03:10

 

1969년 5월 26일 강원도 두메산골 여중생이 '모범 청소년'으로 뽑혀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는 5·16 장학금까지 받았다. 소녀의 공적은 '떡 팔아 급우 수업료를 내준 것' 외에도 특별한 게 하나 더 있었다. '북괴로부터 날아온 불온 삐라를 주워 경찰에 신고하는 등 반공 정신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 삐라와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북한의 불온 삐라는 보는 즉시 우체통에 넣자”고 알린 1970년대의 포스터(왼쪽)와 이달 초 서울 영등포구 일대에서 발견된 북한 선전 삐라들이라며 네티즌이 블로그에 올린 사진.

북한이 풍선을 이용해 서울 상공으로 삐라를 뿌리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들어서다. 1961년 12월 5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북측의 전단 살포 사실을 발표하면서 '최후발악적 흉계'라고 맹비난했다. 1961년부터 3년간 삐라가 38만2000여장이나 수거됐다. 초기엔 간첩만큼 엄중하게 대응했다. 발견한 사람은 간첩신고 전화인 113번으로 신고하게 돼 있었다. 치안국은 국민에게 '불온 삐라를 주워 갖고 있을 경우는 처단할 것'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실제로 1969년 2월에는 전단을 주운 후 신고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던 21세 청년이 첫 유죄 판결을 받았다. '북괴를 찬양 또는 이롭게 한 죄'였다. 삐라를 갖고 있다가 학교 선배 1명에게 보여줬던 서울대생이 구속되기도 했다(조선일보 1971년 10월 22일자). 삐라는 무조건 신고하도록 얼마나 잘 교육이 됐던지 1968년 11월 울진·삼척에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소탕 작전을 벌일 땐 국군이 공비들에게 귀순을 권유하기 위해 뿌린 삐라를 주민들이 북한 삐라로 잘못 알고 주워다 앞다퉈 신고하는 해프닝까지 빚어졌다.

제3공화국 정부로서 북한 삐라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김일성 수령님은 민족의 태양'이라는 따위의 구호보다 '평양 인민의 풍족한 생활' 같은 내용이 더 문제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1인당 GNP는 우리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삐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행적이나 피살된 호스티스 정인숙과 고위층의 성(性) 스캔들 의혹 등 껄끄러운 문제를 들쑤시기도 했다. 오늘의 증권가 '찌라시'처럼, 대중이 모르는 천기(天機)를 누설한 종이 쪼가리들은 전력을 다해 치울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삐라를 주웠을 때는 경솔하게 서로 나누어 보거나 하지 말라"는 표현까지 썼다. 발견하는 즉시 우체통으로 넣어 달라고 했다. 삐라 관련 보도에도 당국의 대응은 민감했다. 1965년 10월 어느 신문이 '서울 주택가에 북괴 신문 배달'이라는 기사를 싣자 중앙정보부는 신문이 아니라 삐라고, '배달'된 게 아니라 풍선으로 띄워 보낸 것인데 잘못 보도했다며 해당 기자를 구속했다.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해 땅에 묻은 타임캡슐에도 북한 삐라가 들어갔다. 어린이들이 파출소에 가져다 주고 학용품을 받았던 추억이 묻은 물건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붉은 삐라가 요즘 매스컴에 다시 오르내린다.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응해 우리 군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이후 북한이 지금까지 뿌린 삐라가 1000만장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네 치킨집 전단보다 조잡한' 삐라는 21세기 네티즌에게 실소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북한이 뭔가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서울로 계속 날리는 중이라면 시대착오도 이런 시대착오가 없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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