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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40] 국회, 방청객 '다리 꼰 자세' 금지하자 촌로들 항의… '하반신 가림막' 설치

by 까망잉크 2023. 6. 18.

[김명환의 시간여행] [40] 국회, 방청객 '다리 꼰 자세' 금지하자 촌로들 항의… '하반신 가림막' 설치

김명환 전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10.19. 03:09
 

1984년 7월 9일 국회 상공위에 신임 인사하기 위해 출석한 석탄공사 이사장의 '앉은 자세' 때문에 회의가 세 차례나 정회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사장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자 야당 의원이 "오만불손한 태도… 국회 모독"이라며 사과를 요구했으나, 이사장은 "왜 앉는 자세를 갖고 그러느냐"며 맞섰다. 야당 측은 각료도 아닌 부처 산하기관장에 대해 유례없는 '파면 권고 건의안'까지 거론했다. 사태는 이사장의 사과로 3시간 만에 겨우 수습됐다(조선일보 1984년 7월 10일 자).

1987년 9월 방미한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가 다리를 꼰 자세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 노 총재는“레이건이 다리 꼬길래 나도 꼬았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1980년대엔 국회에 출석한 기관장이나 증인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가 의원에게 혼쭐나는 일이 가끔 보도됐다. 1988년 10월 24일 중앙선관위에 대한 국감장에 증인으로 나온 모 교수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신문을 받다가 국회사무처 직원으로부터 시정 요구를 받았다. 교수는 "뭐가 문제냐"며 맞섰지만, 정동성 내무위원장이 '모욕적 언행으로 국회 권위를 훼손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라는 법조문까지 거론한 끝에 교수를 국감장 밖으로 추방했다. 1993년 국감 때도 총리실 비서관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가 "국회의원을 뭐로 아느냐"는 호통을 받고 총리 비서실장이 사과하는 곤욕을 치렀다.

그 시절엔 국회 방청객의 자세도 규제했다. 본회의장 2층 방청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간 직원으로부터 고쳐 앉으라는 주의를 받기 일쑤였다. 아래층 정면에 앉아 있는 국회의장에게 결례가 된다는 이유였다. 지역구 의원의 초대를 받아 상경한 촌로들은 "내 다리도 마음대로 못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난감해진 국회사무처는 1994년 9월 절묘한 해결책을 찾았다. 방청석 맨 앞에 검정 유리 가림막을 낮게 설치해 방청객의 하반신이 의장석 쪽에서 아예 보이지 않게 했다. 언론은 '국회의 탈(脫)권위주의적 변화'라고 평가했다.

 

다리 꼰 자세는 종종 "당신에게 호락호락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을 낮춰야 하는 모든 자리에서 조심해야 하는 자세다. 박찬종 변호사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그의 어머니는 선거철이면 유세장을 따라다니며 박 후보가 연단에서 다리를 꼬고 앉으면 '다리를 풀라'고 쪽지를 넣었다. 이 자세는 때론 당당한 태도의 표현처럼 읽힌다. 1987년 9월 14일 방미한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가 레이건 대통령을 만날 때 다리를 꼬고 앉아 눈길을 끌었다. 그 이전엔 우리 정치 지도자가 외국 정상과 대좌하면서 그런 자세를 취한 경우를 보기 어려웠다. 귀국 후 "레이건이 다리 꼬길래 나도 꼬았다"고 밝힌 노 총재의 말이 화제가 됐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민정당은 노 총재의 다리 꼰 회담 장면을 당당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홍보하려 애썼다.

오늘날엔 국회에서 다리 꼬고 앉았다고 쫓겨나는 일은 보기 어렵다. 지난 13일 미르와 K스포츠재단 의혹을 다룬 국감장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진이 보도됐지만, 국회가 이를 문제 삼았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남의 다리 자세까지 규제했던 타율의 시대가 흘러갔다는 방증이겠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추궁받으러 불려 나온 사람이 다리를 꼰 모습이 주는 거부감이란 세월 흘렀어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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