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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38] 20년간 12차례… [김명환의 시간여행] [39] 유신 시절 등장한 '피임기구 자판기'…

by 까망잉크 2023. 5. 25.

[김명환의 시간여행] [38] 20년간 12차례… '공무원 외식 금지령'… 배달시키기 등 꼼수 난무… 흐지부지

김명환 전 조선일보사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10.05. 03:08
 
1975년 1월 9일 서울 광화문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중앙청 정문에서 총무처 단속반에 무더기로 걸렸다. '공무원의 점심 외식을 일절 금한다'는 국무총리 훈령을 어긴 죄였다. 외식한 공무원 전원이 단속반에게 이름을 적혔다. 이날 출입기자단과 불고기 회동을 했던 문공부 국장급 간부들까지도 걸렸으나 '우리는 장관 허락받아 행사에 참여한 것'이란 해명 끝에 단속을 면했다(조선일보 1975년 1월 10일자).

1960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정부는 공무원 기강을 다잡을 때마다 '외식 금지령'을 내렸다. 제1호는 4·19 혁명 직후 내려졌다. 1960년 8월 25일 전 공무원에 시달한 생활혁명의 첫 과제가 외식 금지와 도시락 지참이었다. 그러나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도시락 지참 운동 첫날에도 공무원 태반은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공무원을 상대로 도시락 먹기 운동을 열심히 펼쳤지만 '바시락 부시락 도시락 정권'이라는 빈축만 산 채 성공하지 못했다.

1960년 8월 25일 전 공무원에 대한 점심 외식 금지령이 처음으로 내려지자 ‘양은도시락’에 싸온 밥으로 사무실에서 식사하는 공무원들 모습(왼쪽)과 1960~70년대의 공무원 외식 금지를 보도한 기사들.

제3공화국 때 공무원 외식에 대한 규제 목소리는 더 커졌다. 1970년대 후반까지 정부가 공직 사회에 내린 '금지령'은 신문에 보도된 것만 12번쯤이나 된다. 해제령이 내렸다는 보도는 없으니 금지령은 계속 살아있던 셈인데 똑같은 명령을 왜 반복했을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대 총리나 장관은 저마다 외식 엄금 등 공직자 기강 확립을 외쳤지만 길어야 서너 달이면 관청 앞 식당은 다시 붐볐다. '작심 3개월'이었다. 나사 풀린 공무원들 꼴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1965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전 고위 공무원들에게 경고성 친서를 보냈다. 대통령은 친서에서 '공무원들 근무 상태가 해이되어 10시쯤 출근해 우물쭈물하다가 점심을 두세 시간씩 먹고, 서랍 정리나 한 뒤 5시 반쯤 퇴근하는 사례가 태반'이라며 질타했지만, 공직 사회 기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정권마다 심심하면 국민을 상대로 쇼를 벌이는 것이냐"는 식의 비판도 일어났다.

약삭빠른 일부 공무원은 갖은 꼼수로 변칙 외식을 했다. 어떤 지방 시청 직원은 단속을 피하려고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바람에, 매일 정오만 되면 청사가 배달원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내부 외식'이란 말이 나왔다. 도시락을 먹으라 했더니 어느 고위 공직자는 집에서 진수성찬을 요리해 관용차로 날라 먹었다. 단속은 미지근할 뿐이었다. 1962년 외식한 공무원 1명을 파면한 일이 있지만, 그 밖엔 중징계를 당했다는 보도를 찾기 어렵다.

공무원의 점심 식사에 대한 규제의 역사는 이토록 깊다. 옛 외식 금지령은 '검약'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공무원 부패의 연결고리였던 외부인과의 식사 자체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컸다. '김영란법' 같은 부패 견제 장치의 전신쯤 되는 셈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우리 사회가 대변혁을 맞고 있으나, 현금 결제, 시간차 퇴실, 카드 분할 납부 등 제재를 피하려는 꼼수도 난무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말 한마디로 전국 공무원 점심 외출을 아예 막았던 무지막지한 시대에도 요리조리 그물을 빠져나갔던 일부 미꾸라지의 '변칙 DNA'가 또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청렴 사회로 가기 위해 더 비상한 노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 [39] 유신 시절 등장한 '피임기구 자판기'… "젊은 혈기 性에 쏟게 한다" 비판도

김명환 前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10.12. 03:08
 

1972년 5월 어느 날 고궁과 유원지 매점마다 놓인 낯선 철제 박스가 나들이 나온 시민들 시선을 붙들었다. 50원 동전 1개를 넣으면 콜라, 사이다가 컵에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음료 자판기의 첫 등장이었다. 일회용 컵이 없던 때여서 앞 손님이 사용한 플라스틱 컵을 물로 씻어 써야 하는 불완전한 장치였다. 돈만 넣으면 기계가 지체 없이 음료를 대령하자 언론은 '상냥한 상혼을 가졌다'고 표현했다.

이 기계의 국내 상륙 전부터 신문엔 서구의 자판기 문화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소개됐다. 1959년엔 "영국에서는 수줍어하는 처녀들을 위해 자동 기계가 '부라쟈(유방대)'와 '빤티' 등을 판매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소설가 정비석은 1960년 미국 여행 중 담배, 콜라에서 우표까지 자판기로 파는 것을 보곤 "미국인의 일상생활은 너무도 기계적인 것 같다. 외상이란 어림도 없겠다"라고 혀를 찼다.

피임기구 자판기의 등장을 알린 1975년 신문 기사(왼쪽·경향신문 6월 7일자)와 1977년 2월 우표 자판기를 조작해 보는 박정희 대통령. 오늘의 정치인이 뉴스 카메라 앞에서 첨단 기기를 작동해 보이듯 40년 전 대통령은 자판기에 동전을 밀어넣었다.

유신 시절인 1975년엔 또 한 가지 자판기가 국내에 새로 등장했다. 남성용 피임기구(콘돔) 자판기였다. 대대적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던 대한가족계획협회가 미국에서 들여와 서울역 등의 화장실에 설치했다. 당시엔 콘돔을 약국에서만 팔았기 때문에 많은 남성은 약사에게 낯을 붉혀가며 사야 했다(조선일보 1973년 3월 16일자). 협회는 무인 자동판매기라면 피임기구 구입이 훨씬 편해져 호응이 클 것이라고 봤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자판기조차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많아 판매가 신통치 않았다. 일각에선 "남녀 간 무분별한 성행위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서울대 모 교수는 "데이트 중 화장실에 들렀다가 피임기구 자판기를 발견한다면 젊은이들은 '옳지, 저거다' 하고는 심리 반응을 일으킬 것 같다"며 호텔·여관 업자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프리 섹스 풍조를 불러일으켜서 젊은이들 혈기를 그 방면으로 뽑아버릴 수 있는 효과가 있을는지는 모르지만…"이라는 의미심장한 언급도 덧붙였다.

자판기의 꽃인 커피 자판기의 시대는 1978년 열렸다. 웬만한 회사 빌딩마다 1대씩 놓여, 인근 다방을 울상 짓게 만들었다. 직장인은 달콤한 자판기 커피 맛에 중독돼 갔지만 언론은 '인간끼리의 접촉 없는 상행위는 비인간적'이라며 자판기를 '괴물'이라고 냉소했다. '이러다간 2000년대쯤엔 외로운 홀아비가 동전을 넣으면 미모의 여성 복제 인간이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라는 말도 나왔다. 어느 대기업이 '자동판매기 한 대가 아빠 봉급을 앞질렀어요'라고 광고하자, 한 시민은 "10년 동안 일한 내가 100만원짜리 기계보다 못하다니 허탈하다"고 토로했다.

오늘날 자판기는 첨단 장치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다. 없으면 불편한 편의시설일 뿐이다. 지난주 대구시의 서비스업 종사자를 위로하러 찾아간 대학생들은 '감정 자판기'라는 대형 박스 속에 들어앉아 판매구 밖으로 손만 내밀어 사랑, 위로, 칭찬을 전했다고 한다. 때론 직접 눈 맞추고 대면하기가 부담스러워 자판기 같은 비(非)대면 소통이 더 편하다고 여기는 세대다. 기계와의 거래가 비인간적이라고 목청 높였던 옛 자판기 비판론자들은 이런 시대가 올 줄 알았을까.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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