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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36] 노인에게 버스 좌석 양보 않으면 단속… [김명환의 시간여행] [37] '사내 연애 엄금'

by 까망잉크 2023. 5. 13.

[김명환의 시간여행] [36] 노인에게 버스 좌석 양보 않으면 단속… 대통령이 "자리 양보 풍습 확대" 강조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9.21. 03:06
 

1973년 시내버스로 출퇴근하던 70세의 의사 김모씨는 매일 수첩에 특별한 기록을 해 나갔다. 그날 버스에서 좌석을 양보받았는지, 양보받았다면 어떤 연령·계층의 승객이 호의를 베풀었는지를 꼼꼼히 적었다. 9개월간 조사한 결과, 962차례나 버스를 타는 동안 양보를 받은 횟수는 320회였다. 세 번에 한 번꼴밖에 안 됐다. 양보를 제일 잘 해주는 사람은 26~30세의 남자였고 노인을 가장 못 본 체하는 건 여중생들이었다. 자리를 내준 사람 중엔 점퍼 차림의 시민(65.8%)이 대다수였고 양복쟁이(31.1%)는 적었다. 특히 김씨는 이 조사를 통해 '연애하는 젊은 남녀'는 노인이 앞에 서 있어도 절대로 일어서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칠순 노인의 조사는 노인에 대한 좌석 양보에 인색한 세태에 일침을 놓으려는 뜻이었다.

‘길거리에 침 뱉기’ ‘노약자에게 버스 좌석 양보하지 않기’ 등 8가지 ‘비도덕적 행위’도 경찰이 단속해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음을 알린 신문 기사(조선일보 1967년 2월 1일 자).

시내버스가 시민의 발이 되어가던 1950년대부터 노약자를 못 본 체하며 앉아 있는 젊은이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신문에 자주 등장한다. 어떤 시민은 "노인이 서 있는데도 피둥피둥한 학생들이 버젓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증오감이 생긴다"는 표현까지 썼다. 1960~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버스 좌석 양보는 젊은이의 의무였다. 차 안엔 '노인과 어린이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고, 안내양은 이런 내용을 승객에게 열심히 외쳤다. 최고권력자까지 이 문제를 거론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은 시내버스에 탄 할머니와 장애 학생에 대한 자리 양보 미담을 '외국인도 부러워하는 경로사상'의 사례로 소개하며 "앞으로 이런 좋은 면은 크게 확대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1967년 2월엔 경찰이 '자리 양보 안 하는 행위'를 8대 비도덕적 행위의 하나로 규정해 벌금을 부과하겠다며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조선일보 1967년 2월 1일 자).

반세기 전, 대중교통 좌석 양보는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보다는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 윤리에 따른 어른 공경 행위라는 데에 무게가 실렸다. 서 있는 노인을 보고도 딴전 피우는 학생에게 옆의 아저씨가 "학생! 자리 좀 양보해 드려" 하고 훈계하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그 시절 상당수 젊은이도 '나이순으로 앉기'라는 질서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공부에 지쳐 핼쑥해진 중학생과 건장한 중년 아저씨 중 누가 앉아야 하느냐'는 식의 문제 제기가 반세기 전 신문에 이미 보인다.

오랜 세월 세상은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대중교통 좌석 신경전은 여전하다. 좌석 우선권을 둘러싼 노인·젊은이 간 견해차는 더 벌어진 느낌이다. 예전 학생들이 버스에서 앉아 가다 노인이 타면 조는 척이라도 했던 건 '양보 안 하는 게 잘못'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지하철 자리에 앉아 코앞에 서 있는 백발노인을 빤히 바라보는 학생도 있다. 일부 청년은 "나도 돈 내고 탔으니 앉을 권리 있다" "양보를 하고 안 하고는 내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장유유서 윤리의 퇴조와 함께 '약자 보호' 의식까지 덩달아 실종돼 가는 듯해 씁쓸하다. 캠페인 따위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지경에 왔다. 지난달 당국 발표에 따르면 서울시 교통 인구 중 고령자, 장애인, 임신부 등 교통 약자가 227만명으로 교통 인구 4명 중 1명꼴이라고 한다. 현실에 맞춰 교통 약자 좌석을 확충하는 등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 외엔 뾰족한 방안이 없어 보인다.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 [37] '사내 연애 엄금' 많던 산업화 시대… 회사 측 절교 요구에 커플 동반 자살도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9.28. 03:06
 

1963년 11월 15일 부산 금정산 기슭에서 한 시곗줄 제조 업체의 남녀 직원이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됐다. 21세, 19세의 남녀는 회사 동료로 만나 3년째 몰래 연애 중이었다. 사내에 소문이 나자 회사 간부가 종업원 50여 명을 모아놓고는 사내 연애를 '공개 규탄'한 게 젊은 커플을 극심한 충격에 빠뜨렸다. 사측은 "동료 간 교제는 절대 용납 못 한다. 사랑을 하지 말든지 직장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청년은 회사 측의 요구를 받은 지 5일 만에 "차라리 저승에서 그녀와 살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함께 음독했다. 조선일보는 16일 자 신문에 '같은 직장 연인들의 정사(情死)'라는 제목을 붙여 대서특필했다.

‘사내 연애 금지’라는 회사 방침을 액자로 만들어 게시한 1970년대 버스 회사 모습. 사규를 어기고 몰래 사내 연애하는 남녀를 그리고 있는 TV 일일 드라마 ‘저 하늘에 태양이’의 한 장면이다.

1970년대 후반 여성 취업이 증가하면서 사내 연애를 둘러싼 갈등도 점점 늘어갔다. 생산성 증대가 지상 과제이던 산업화 시대여서 기업들은 방관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 시절엔 회사 전화로 여사원을 찾는 남자의 전화가 걸려 오기라도 하면, 이를 받은 남자 사원이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운운하며 '정중하게 치근거리는' 일이 많던 시대였다. 여사원의 연애 자체를 마뜩잖게 여겼으니 사원 간 연애는 더 달갑지 않았다. 해당 커플만 업무에 소홀해지는 게 아니라, 사내에 알려지면 그 얘기로 커피 자판기 앞에서 입방아 찧느라 다른 사원들 생산성까지 떨어뜨린다는 견해도 제기됐다. 어떤 회사엔 '사내 연애 금지'라고 쓴 액자가 내걸렸다. 1979년엔 한 은행의 남녀 은행원이 연인 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은행 측이 여성에게만 사표를 강요했다. 커플이 이를 거부하고 결혼해 신혼여행을 다녀왔더니, 남편은 경남 진주로 아내는 강릉으로 발령 나 있었다. 명백한 보복 인사였다. 금융노조는 물론, 여성계까지 들고일어나 '이 은행에 넣은 모든 예금 인출하기 운동을 펴겠다'고 강력 항의했다.

1980년대까지도 사내 커플은 해고를 피하려고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 몰래 데이트를 했다. 도심 벗어나는 '교외파', 업무 관계 미팅인 척 만나는 '위장 데이트파'도 있었다. 좀 더 간이 큰 남녀는 등잔 밑이 어둡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회사 건물 아래층 다방에서 만났다. 밀회의 긴장감이 둘 사이 애정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도 있었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남자 회사원은 "동료들이 내 여자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걸 보고도 참는 게 큰 고통"이라고 했다. 코앞 연인에게 애정 표현을 제대로 못 하던 사내 커플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은 컴퓨터 시대의 개막이었다. 1990년대 활발히 보급된 PC통신, 이메일·채팅 서비스는 사내 연인 간 은밀한 소통의 수단이 됐다. 1997년 모 그룹 전산운영부가 사원들 간 이메일 내용을 슬쩍 들여다봤더니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사랑'이었다.

지난주 보도에 따르면 중국 광저우 지역 기업의 45%가 사내 연애를 금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사내 교제를 달가워하지 않는 기업들이 있어도 예전에 비할 바 아니다. 사내 커플이 결혼하면 보너스를 준 기업도 있다. 그 회사 경영진은 "좋아하는 상대가 회사에 있다면 출근할 때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긍정적 기운은 회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길게 보면 사내 연애가 회사의 저력을 단단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 눈 돌린 것이다. 근시안적 생산성에 집착하던 기업들이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데 반세기쯤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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