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옛날에 어른이 된 남자가 머리에 쓰는 의관. 원래는 햇볕이나 비를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용구로서, 입형(笠形) 관모를 쓴 것은 삼국시대부터 재료나 제작방법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사회성을 가지는 관모(冠帽)가 되었다.
갓은 조선 시대 복식의 하나로, 양반이 외출시 머리에 쓰는 모자의 일종이다. 갓은 말총으로 만들어졌으며, 보통 검은 색을 띤다. 갓의 둥그스런 모양은 원형의 대나무 틀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19세기에는 중인이상과 기혼자만이 갓을 쓸 수 있었으며, 상투를 보호하는 모자이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때, 갓 둘레의 크기가 대폭 제한되어, 오늘날 구한말이나 개화기의 사진으로 알 수 있는 갓은 모두 이때 줄어든 모습의 것이다. 발달과 정상 맨 마지막에 정립된 입제(笠制)이면서 조선시대를 이어 내려온 대표적인 관모인 흑립(黑笠)은 1367년(고려 공민왕 16)에 원나라의 호복(胡服)을 버리고 다시 옛날 제도로 돌아갈 때 쓰게 하였으며 정자(頂子;갓끈을 갓 양태에 맬 때 다는 것)에 그 사람의 직품을 나타내기 위해서 백옥(白玉)정자·수정(水晶)정자 등을 달게 하였는데 이것이 조신(朝臣)들이 쓴 갓의 시초이다. 갓은 기본적으로 방갓형[方笠型(방립형)]과 패랭이형[平凉子型(평량자형)]에 속하는 모든 종류가 포함되지만 오늘날에는 좁은 의미의 갓, 즉 흑립만을 지칭한다.
갓에 딸린 것으로는 갓끈·갓양태·갓집 등이 있다. 갓끈은 갓에 달린 끈으로 헝겊을 접거나, 나무·대·대모·산호·수정·유리·호박 등을 꿰어 만드는데, 직위에 따라서 재료가 달랐다. 갓끈의 모양과 재료만 가지고도 신분을 알 수 있었으며, 율령(律令)으로 이를 정하여 시행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신분제가 문란해지면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갓싸개는 갓을 보호하는 천으로 신분의 귀천에 따라서 포(布)·사(紗)·모(毛) 등으로 구별하였다. 갓양태는 갓의 차양으로 둥글고 넓적한 바닥을 의미한다. 갓집은 갓을 넣어두는 물건이며 조선시대에는 의관을 중히 여겨 갓을 넣어둘 때도 반드시 갓집에 넣어두었다. ![]() 주립
조선시대 갓의 하나. 가는 대오리로 대우와 양태(凉太)를 만들고 붉게 옻칠한 것으로, 문무당상관의 융복(戎服)에 착용하였다. 형태는 일반 갓과 같으며 장식으로 호수(虎鬚)를 꽂고 홍색·황색의 구슬을 꿴 패영(貝纓)을 단다. 고종(高宗) 때에 칠사립(漆絲笠)으로 잠시 바꾸었다가 곧 이어 다시 환원시켰다. 왕골 속을 안으로 받쳐 삿갓처럼 만들고, 가늘게 쪼갠 댓개비를 거죽으로 하여 입첨의 가장자리를 사화판형(四花瓣形)으로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오직 향리 계급에서만 착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유교적 관점에서 죄인시하였던 상제(喪制)의 쓰개로 남게 되었다..
황색초(黃色草)를 사용하였고 크기가 작고, 패랭이보다 대우와 양태가 분명하며 모정(帽頂)도 편평하다. 관례(冠禮)를 끝낸 소년이 흑립을 쓰기 전까지의 중간물로 착용하였으며, 별감(別監)도 상복(常服)에 황초립을 착용하였고, 입식(笠飾)으로 호수(虎鬚)를 달았다.
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써 흑립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다시 그 위에 베를 입힌 백색의 갓이다. 국상(國喪)때 일반 남자가 착용하였고 조선초에는 평상시 착용하였다. 그러나 예종 이후에는 상용(喪用)으로 그 용도가 제한되었다.
짐승의 털을 다져 만든 담을 골에 넣어 위는 높고 둥글며 전이 편평하고 넓게 되어 있는 평량자형 쓰개이다. 한편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주로 군인이 많이 썼다
참고:야후 백과사전,
브리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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