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뛰기
추천(韆)이라고도 함. 남성의 씨름과 더불어 단오절의 가장 대중적인 놀이이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북방의 오랑캐들이 몸을 날쌔게 하기 위해 한식날에 거행했던 것을 후에
중국 여자들이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한(漢)과 당(唐)에 이르러서는 궁중에서까지 경기대회가 있었다고 하며,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려시대에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즐겼으나 조선시대에는 상류층에서 이를 멀리하게 되고
민중 사이에 크게 유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네는 대개 농번기를 피해 음력 4월 8일을 전후하여 5월 5일 단오절에 이르는 약 한 달 동안 놀았는데,
이 놀이는 오랜 봉건유습에서 내려온 삼간내외법으로 1년 내내 집안에서 바깥 구경을 못하던 젊은 여인네들이
단오날 하루만이라도 밖에 나와 해방감을 맛보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네경기는 외그네·쌍그네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놀 수 있으며, 누가 제일 높이 올라가느냐에 따라 승부를 정한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뛰는 것을 쌍그네 또는 맞그네라고 하는데, 이것은 여흥적으로 하는 것이고 보통은 외그네를 뛴다.
지역에 따라서 그네를 뛰면 발에 무좀이 생기지 않고,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도 승부를 결정한다. 첫째, 나뭇가지 또는 꽃가지를 목표물로 정하고 그것을 발 끝으로 차거나 입에 물어 승부를
정했으며, 가장 오래된 방법이었다. 둘째, 그네 앞쪽에 방울줄을 높이 달아놓고 그것에 닿도록 하는 것인데, 밑에서
조종하여 방울줄을 점점 높여감으로써 최고 높이를 측정한다. 셋째, 그네줄 발판 밑에 자눈을 박은 줄을 매어놓고 그네줄의
정지지점부터 얼마나 공중으로 올라갔는가를 측정하여 우열을 결정하는 방법으로 이것은 근래에 창안되었다
문헌상 우리 나라에서 그네뛰기 놀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초 고려 말기부터이다. 《고려사(高麗史)》<최충헌전(崔忠獻傳)>에 “단오에 권신 최충헌이 백정동궁에서 그네뛰기를 베풀고, 문무 4품 이상의 선비를 초청하여 3일 동안 놀았다고 하고 ~중략~ 그리고 기생과 재인(才人)에게 그네뛰기를 하게 하였다. 또 우왕(禑王)은 수창궁에서 임치 등과 함께 그네뛰기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시인 이규보(李奎報)는 “우리 나라 풍습에 단오에 반드시 이 놀이를 한다.”고 했으며,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따르면 15세기에 서울 시민들은 단오 명절에 종로 네거리 뒷골목에 화려하게 그네를 설치하고 남북 두 패로 나뉘어 내기를 하였는데, 서울 안 부녀자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성현(成俔)이 지은 시에도 나타난다. 또한 《춘향전(春香傳)》에 “장장채승 그넷줄을 / 두 손에 갈라 쥐고 / 선뜻 올라 발 굴러서 / 한분 굴러 뒤가 솟고~”로 춘향이가 그네뛰는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행하던 놀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밀양 아랑제’ ‘남원 춘향제’ 등 축제 때 간혹 치러지는 것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밖에 담뱃갑에도 그네뛰기 모습이 나오고, 1967년에는 우표에 그림이 그려질 정도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놀이로 이해되고 있다. |
출처:문화원형,더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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