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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거짓 맹세는 자손을 장님 만든다.

by 까망잉크 2008. 12. 31.

 

 

성석린(成石璘)의 거짓맹세

 

 

조선시대 하나의 野史에 지나지 않겠지만 거짓맹세를 하여 자손을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대로 된다면 지금 세상에 자손을 장님으로 만드는 정치인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거짓으로 맹세하거나 거짓으로 국민을 속이는 정치가 사라지겠으니 깨끗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럼 역사 속으로 거짓 맹세로 자손을 장님으로 만든 주인공 만나러 가야겠다.

 

○ 방석의 변이 있은 뒤에 태조가 왕위를 버리고 함흥으로 갔다. 태종이 여러 번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안을 하였는데, 태조가 번번이 활을 버티고 기다리고 있어서 전후 여러 차례 갔던 사자가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성석린(成石璘)은 태조의 옛 친구로 그가 자청하여 태조의 뜻을 돌이킬 것을 다짐하므로 태종이 허락하였다. 석린이 백마를 타고 베옷 차림으로 과객같이 하고 말에서 내려 불을 피워 밥을 짓는 시늉을 하였더니, 태조가 바라보고 내시를 시켜 가 보게 하였다.

 

석린이 “용무가 있어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 한다.” 말하니, 내시가 돌아가서 그대로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곧 불렀다.

 

석린이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하니, 태조가 변색하여 이르기를,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 아니냐.” 하였다.

석린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이 말을 믿었다.

그래서 양궁(兩宮 태조와 태종)이 이때부터 화합해졌으나, 뒤에 석린의 두 아들은 과연 눈이 멀었다. 《축수편(逐睡篇)》

석린의 맏아들 지도(至道)와 지도의 아들 창산군(昌山君) 귀수(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다 태중에서부터 장님이 되어 삼대를 이었고, 석린의 작은 아들 발도(發道)는 후사가 없었다. 《명신록》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의 함흥 주필(咸興駐蹕)에서

**주필(駐蹕) : 임금의 행차(行次)가 머무는 것.

 

성석린 [成石璘, 1338~1423]: 본관 창녕(昌寧). 자 자수(自修). 호 독곡(獨谷). 시호 문경(文景).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한 후 학유(學諭)·전리총랑(典理摠郞)을 지냈다. 신돈(辛旽)과 대립,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좌천되고, 1384년(우왕 10)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출전하여 적을 격퇴하고,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었다. 그후 양백연의 옥사에 연좌되어 함안(咸安)의 수졸(戍卒)로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다.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공양왕을 내세운 공으로 찬화공신(贊化功臣)이 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일파로 추방되었다. 그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 등을 거쳐 좌정승에 오르고,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진 후, 1415년 영의정이 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草書)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유명하였다.

 

 

 

送僧之楓岳(송승지풍악) 풍악에 가는 스님을 보내며 -成石璘(성석린)-

 

一萬二千峰(일만이천봉) 금강산 일만 이천 봉

高低自不同(고저자부동) 봉 마다 높낮이가 서로 다르지.

君看日輪上(군간일륜상) 여보게 자네 일출 모습 꼭 보시구려

何處最先紅(하처최선홍) 어느 봉우리가 맨 먼저 붉어지나.

해석 2

일만 이천 봉우리가

높낮이가 절로 한결같지 않구나.

그대는 보게나, 둥근 해가 떠오를 때에

높은 곳이 가장 먼저 붉어지는 것을...

[출처] 거짓 맹세는 자손을 장님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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