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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제1호] 치과의사

by 까망잉크 2011. 2. 8.

[대한민국 제1호] 치과의사

함석태

日의사 개업 17년 뒤 탄생한 한국인 의사 함석태

"6개월간 치과 진료비를 3할 깎아주고, 병자(病者)와 15세 미만자는 반액으로 할인합니다."

한국에서 치과를 첫 개원한 일본인 노다 오지(野田應治)가 1903년 개업 10주년 기념으로 황성신문에 낸 광고다.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그는 인천공립병원에서 조수로 일했다. 그는 치과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도쿄의 다카야마(高山)치과의학원에 진학해 1893년 치과개업시험에 합격해 제물포에서 첫 치과를 열었다. 그러나 주 고객인 일본인 수가 적자, 1894년 4월 서울로 옮겨와 남대문에서 노다치과의원을 열었다. 그에게 도전장을 낸 것은 1902년부터 국내에 들어온 일본인 입치사(入齒士)들이었다. 인공치아를 만들어 심어주는 이들로, 당시는 치과의사와 입치사를 구분하는 법률이 없을 때였다. 입치사들의 공세에 밀려 노다는 파격적인 진료비 할인 광고를 신문에 냈던 것이다. 당시 '순금입치' 2~10원, '백금충전' 1~5원, '은충전' 50전~1원이었다<큰 사진>. 치아에 금을 씌워 반짝거리게 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치과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입치사들에게 기공기술을 배운 한국인들이 늘면서 1907년 최승용이 서울 종로에서 처음으로 치과시술소를 연 뒤 안중수·김한표·신정휴 등이 뒤를 이었다. '이 해박는 집' '잇방' '치방'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한국인으로 정규 교육을 받고 치과의사가 된 이는 함석태(1889·작은 사진)였다. 평안북도 영변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러일전쟁(1904~1905년)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치과의과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14년 봄 귀국 후 서울 삼각동(광교)에 '한성치과의원'을 열었다. 총독부 치과의사 면허 1호였다. 그는 "일본 아동들은 칫솔을 사용하지만 조선 아동들은 손가락으로 소금을 묻혀 사용한다. 그러나 잘 닦지 않아 입안 위생이 얼마나 나쁜지 모른다"고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1922년 서울에 경성치과의학교가 생겨 졸업생들이 나오자, 함씨는 이들을 규합해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를 결성, 회장을 맡았다. 그는 해방 전해에 미국의 포격을 피해 고향인 평안도 영변에 갔다가 이후 소식이 끊겼다. 함석태 이전에도 대한자강회 회원이던 김영재(金英哉)가 '1906년 일본의 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치과를 처음 문 열었다'(태극학보, 1908년)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실제 개원 여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는 게 없다. 미국으로 유학 간 한성외국어학교 출신 홍윌슨은 1916년 미국에서 개원했다. 함영태에 이어 1917년 일본에서 공부한 한동찬이 두 번째로 평양에서 개원했다. 1926년 박봉남이 도쿄 명화(明華)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국내 첫 여성 치과의사가 됐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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