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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by 까망잉크 2018. 3. 7.

 

 

<조선왕조 뒷 이야기>

(주)하동신문 0 1,715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공민왕때 삭방도만호겸 병마사였던 이자춘(李子春)의 차남으로 기록 되어 오는데, 이는 문제가 되는 구시대적 이야기다.
사실은 배는 다르지만 다섯 살 위인 이복형 이원계(李元桂)가 있었고, 그의 동복형은 젊었을 때 아우 이성계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기습 당해 목이 물려 죽었다.
이자춘은 아내가 셋이었다. 첫 부인은 영흥의 천호(千戶) 벼슬을 하던 최한기의 딸이었는데, 그 사이에 호환(虎患)으로 죽은 첫 아들과 차남 이성계, 딸이 하나 있어 뒤에 정화공주라하여, 도체찰사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다.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를 낳은 이자춘의 둘째 부인은, 그의 노비 내은장이었는데 성씨는 이씨였다.
이성계는 나이 많은 이복형 이원계를 극히 존경했고, 그 자녀들도 가벼이 여기질 않았다. 이원계는 아버지의 품계를 이은 배다른 아우 이성계휘하에 들어가 아우를 성심으로 보필했다.
일찍이 공민왕 때 이성계를 도와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 되고, 위화도회군 때 이성계와 뜻을 함께하여 회군공신에 들었다. 이성계는 형 이원계의 생모 이씨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개국 후에 형을 개국공신 2등에 책록, 완산군으로 봉군까지하여 자손들도 챙겨 군(君)으로 호칭하게했다.
이자춘의 세 번째 아내는 역시 노비였던 고음가라는 여종으로 성씨는 김씨였다. 아들 이화(李和)를 낳으니, 이는 다섯 살 아래인 이성계의 이복 아우였다. 이화도 이성계휘하에서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웠고, 위화도회군 공신에 올랐다.
형 이성계의 개국에 적극 참여하여 개국1등공신에 책록 되고, 태조7년(1398) 왕자의 난때 이방원 편에 서서 정사1등공신에 올랐다.
뒤에 정종2년(1400) 이방원의 바로 위 형 방간(芳幹)이 이방원을 축출하려고 일으킨 2차 왕자의난 때도 이방원을 지지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했다.
이리하여 이화는 조카 이방원이 가장 믿는 측근으로 신임 받아, 이방원이 등극하자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이방원 집권 7년째인 태종7년(1407), 태종의 처남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 형제가 남매 사이인 태종을 믿고 종친을 가볍게 여기며 방자하게 굴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그들 형제를 죽음으로 몰았다. 이리하여 이화는 더욱 태종의 신임을 받아 7명의 아들과 딸 하나까지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이성계의 형제들은 비록 어머니는 달라도 우애가 돈독하여 새 왕조를 여는데 힘을 합쳤다. 이성계를 이자춘의 차남으로 고집한다면, 호환을 당해 죽은 아들을 아들로 치지 않았던지, 아니면 이복형 이원계를 뭉개 버렸던지 둘 중 하나다.
고쳐 살피고 이해할 일이다. 

<옴긴글>

 

 

 

<조선왕조 뒷 이야기>

(주)하동신문 0 1,801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1392년 7월 17일, 이단(李但)으로 개명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수창궁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갖고 새 왕조를 열었다.
태조 이단은 정식 혼례를 치른 정부인이 둘이었다.
여섯 아들을 둔 첫부인 한씨(韓氏)와, 뒤에 고려조의 권신 강윤성(康允成)의 딸 곡산강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이는 그의 출세를 위한 정략적 냄새가 짙었다.
이 때문에 한씨는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다가, 지난해 55세 나이로 그만 세상을 뜨니, 한참 뒤 정종때 비로소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8월 7일, 아들 둘을 낳은 강씨를 공식 왕비로 책봉하여 현비(顯?)라 했고 뒤에 신덕왕후에 봉했다.
이어 세자책봉 문제가 대두되자, 한씨는 남편이 왕이 되기 전 죽었기로 왕비가 아니고, 자신이 명실상부한 왕비임으로 왕비 소생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강씨의 주장에 무게가 실려, 태조는 제일 막내인 11세의 의안대군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니, 이가 곧 조선 최초의 왕세자다.
왕비 강씨는 자기의 큰 아들 방번(芳蕃)을 세우려했으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이, 방번은 깜이 못 된다고 극력 반대하여 일이 그렇게 되었다.
이리하여 태조왕실에 분란의 먹구름이 드리우니, 아버지를 도와 개국에 목숨을 걸었던 한씨 소생 아들들의 원한이 하늘을 찔렀고, 특히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태종)은 강씨의 소행에 이를 갈았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세자 방석은 자리가 그야말로 바늘 방석이었다.
태조5년(1396) 8월 13일, 문제의 신덕왕후 강씨가 죽고, 마침 태조도 몸에 병이 붙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눈에 불을 켜고 때를 노리던 이방원은 태조7년(1398) 8월 26일, 마침내 형제들과 합심, 세자의 측근 정도전.남은(南誾).변중량(卞仲良) 등을 죽이고, 방석을 세자 자리에서 밀어내 버렸다.
사실 정도전 등 세자 측근들은 진작부터 걸림돌이 되는 한씨 소생 아들들을 일망 타진할 틈을 노리다가 그만 탄로 나는 바람에 역습을 당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어미 잃은 병아리 신세의 세자 방석과 동복형 방번은, 목숨만은 살려 유배 보내는 모양새로 대궐문을 나섰는데, 하염없는 유배길에서 배경이 뻔한 자객의 칼에 목숨을 앗기니, 세자의 나이 17세, 형 방번은 18세였다.
참으로 바닥을 헤매는 민초 보다 못한 왕세자의 최후였다. 살아 입김이 거세던 강씨 아들들이, 애써 차려진 밥상을 차지하는 일은 하늘의 뜻이 아닌 것 같았다.
이리하여 조선 최초 세자의 운명을 비참했다. 이방원의 손자인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잇다가, 금성대군이 형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사건에 관련하여 역적으로 몰려 죽는 까닭으로, 세종의 후궁 출신 밀성군 이침(李琛)의 아들 춘성군이 방석의 뒤를 이어 오늘날 전주이씨 의안대군파를 형성하였다.
태조와 한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나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 올랐으나 강씨의 반대로 세자가 되질 못한 방우(芳雨)는, 개국 직후 세상 보기 싫다는 듯 40세 나이로 죽었다. 둘째 방과(芳果)는 전혀 왕권에 관심이 없어, 방원이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한다고 말해 왔는데, 태조의 반발과 민심을 우려해, 과도기적으로 2년 2개월간 복에 없는 왕(정종)노릇을 하다가 방원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3남 방의(芳毅)는 정치 권력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더니 역시 40대 젊은 나이로 죽었다. 4남 방간(芳幹)은 욕심이 있어 아우 방원을 어떻게 해보려하다가 패하여, 충청도 홍주에 유배 당해 현지서 58세로 죽었다.
5남 방원은 어렵게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았는데, 강씨가 뼈골에 사뭇쳐 가장 서둘러 손을 쓴게 「서얼(庶孼) 차별제도」였다. 6남 방연(芳衍)도 일찍 요절하는 등, 태조의 여덟 왕자들 생애는, 후세에 여러 가지 의미들을 남겼다.

 


 

 

<옴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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