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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53 “사실을 숨기면 살려 준다!”

by 까망잉크 2018. 3. 31.
<조선왕조 뒷 이야기> 53 “사실을 숨기면 살려 준다!”

(주)하동신문 
세조1년(1456) 6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들켜 추국장에서 닦달 당하는 단종충신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당당했다. 진즉부터 목숨 쯤이야 팽개칠 마음 준비를 단단히했다는 의연한 얼굴들이었다.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왕위를 이으니 궐 안팎의 공기가 어수선했다. 왕권을 탐낸 수양대군의 행보가 노골적으로 엿보일 즈음 어느날, 박팽년(朴彭年)이 하위지(河緯地)를 찾아 비올때 걸치는 도롱이를 빌렸다. 이때 하위지는 둘이 함께 느끼는 울적한 맘을 담아 시를 지었다.
男兒得失古猶今  
남아의 얻고 잃음이 예나 이제나 같구나
頭上分明白日臨  
머리 위에는 분명 밝은 해가 떴는데
持贈쇠衣應有意  
도롱이를 주는 일이 아마도 뜻이 있을지니
五湖烟雨好相尋  
호수에 안개비 내릴 때 서로 즐겨 찾으리.
불행한 일이 닥치면 뜻을 같이하자는 의미가 짙게 배인 시였다. 
국청에 끌려 나와 세조와 기싸움을 할때 하위지는 나이 45세, 벼슬은 오늘날의 외교통상부 차관급인 예조참판, 그는 세종이 집현전 학사 가운데 제일로 꼽았던 수재였다. 세조도 참으로 죽이기 아까운 인재로 여겨 머리를 썼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이렇게 돼있다.
『세조가 하위지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비밀히 사람을 보내 이르기를, “만일 음모에 가담한 사실을 숨기면 죽음은 면할 수 있다.” 하였더니, 하위지는 미소를 띄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참으로 별일이었다. 죄인을 추달하는데 「바른대로 대라. 그러면 살려 줄 수도 있다」라고 욱박지르는게 상식인데, 세조는 「죄를 숨기면 살려 준다」했으니 실로 딱했다. 하위지는 확실히 한수위였다. 그는 맘을 다졌다.
「남아의 족적(足跡)은 천추에 새겨지거늘, 언젠가 가고 말 목숨 때문에 어찌 이름을 더렵히랴!」
끝내 생각을 바꾼  세조가 직접 다그쳤다.
“하위지는 듣거라! 네 어찌 내 녹을 먹으며 나를 배반하고 역적모의를 했단 말이냐?”. 
하위지는 눈을 부릅뜨고 받아 쳤다.
“나는 상왕의 신하요! 내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닌데 어찌 ‘배반’이니 ‘역적’이니 한단 말이오! 내 상왕 가까이서 일을 도모하고자 벼슬을 살았을 뿐, 나으리가 준 록미(祿米)는 한 톨도 먹지 않았오! 더럽게 사는 것보다 깨끗이 죽는게 내가 할 바요! 어서 죽여 주오!”
하위지는 불에 달군 쇠붙이로 맨살을 찌지는 작형(灼刑)의 고초를 심하게 겪은 성삼문(成三問) 등과는 달리 지독한 고문은 당하질 않았으나 사지가 찢겨 죽는 거열형(車裂刑)을 함께 받아 세상을 떴다. 
그의 거처에는 세조가 준 녹미가 따로 방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하위지에게는 아직 시집 안간 딸 목금(木今)이와 맏아들 호(琥), 둘째 박(珀)이 있어, 가문이 무너질 때 하호는 열여섯, 하박은 열네살 어린 소년이었다. 
역적 된 자의 아들은 죽어야 했기에 금부도사가 들이 닥쳐 두 아들을 묶으려했다. 하호가 금부도사에게 사정, 방안에 몸져 누운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데, 그 말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어머니! 우리가 죽는 것은 어렵잖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가셨으니 자식이 어찌 따르지 않으리요! 비록 조정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해야 합니다. 이제 어머님을 영결하오니 어머님은 부디 슬픔을 참으소서!. 어머님은 출가하질 못한 누이와 함께 누군가의 노비가 돼 살게 될 것이오니, 부디 아녀자의 도리를 지켜 의롭게 살아 주시길 바라옵니다!”
두 형제는 어머니 앞에 두 번 절하고 마당에 나와 금부도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형리들이 차린 형틀에 매달려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사람들은 두 소년의 죽음을 전해 듣고 ‘참으로 그 아비에 그 아들들이다’하며 눈물 겨워했다. 하위지의 처와 딸은 노비로 신분이 망가져, 단종복위 음모 혐의자들을 잡아 들이는데 맹 활약을 했던 무관 권언(權언)의 「말하는 재산」이 되어 목숨을 이어야 했다.
하위지는 태종12년(1412) 오늘날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단계(丹溪), 아버지는 군수 하담(河澹), 그는 어려서 형 하강지(河綱地)와 함께 바깥 출입을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니 사람들이 얼굴을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세종20년(143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곧 집현전에 들어가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단종때 수양대군이 실권을 휘두르며 승진을 시키려하자 『왕이 친히 내리는 승진이 아니다』며 받질 않아 주위를 놀라게 했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고방산 기슭에 부인과 함께 묻힌 하위지의 묘소가 노송 울창한 숲속에 있는데, 명성과는 달리 찾는이는 드물다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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