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59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누군가 말했다. “천체(天體) 운동은 계산이 가능해도 사람 광기(狂氣)는 계산 할 수없다.” 사람이 미치광이로 날뛰면 그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하물며 광군(狂君) 연산군시대 왕이 머리가 돌아 눈알이 틀어져 버렸으니, 조정 안팍은 하루 하루가 먹구름 속이었다. 저승사자들이 떼를 지어 설치는 형상이랄까. 수많은 억울한 죽음 가운데 한가닥 교훈이 될 만한 딱한 사정을 되짚어 본다.
그전에 폐비 윤씨가 죽던 날, 성종13년(1482) 8월 16일 저녁, 폐비에게 사약을 앞세워 갔던 형방(刑房)승지(청와대법무비서관) 이세좌(李世佐)는 집에 돌아와, 밖에서 있었던 일, 특히 공무에 관해서는 평소 말을 아끼는 성미라, 잠자리에서 말없이 아내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는데, 마침내 아내가 적막을 깼다.
“들리는 이야기로 조정에서 자꾸만 폐비의 죄를 논한다 하던데, 결국 어찌 될까요!” 하고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세좌는 그냥 보통으로 별일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오늘 이미 약을 내려 죽였다”
이세좌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화들짝 놀란 아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크게 한숨을 쉬더니, 신음소리 비슷하게 중얼 거렸다.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미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그 아들이 훗날에 보복을 않을까요! 조정에서 장차 세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그런 거조(擧措)를 한단 말이오!”
순간 이세좌도 ‘아차’ 싶었다. 과연 아내의 예측대로 갑자사화가 빚어지니, 이세좌의 가문은 문을 닫았다 할 만큼 폐족 되고 말았다.
이세좌의 본관은 광주(廣州),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극배(李克培), 좌의정 이극균(李克均), 한성부판윤 이극증(李克增), 김일손(金馹孫)을 미워했던 좌찬성 이극돈(李克墩)의 조카였으니,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주이문5극(廣州李門五克)」으로 명성을 날린 가문 출신이다.
세종27년(1445)에 태어난 이세좌는, 성종8년(1477) 문과에 올랐는데, 그 이튿날 왕은 그를 곧장 사간원의 최고 직위인 정3품 대사간으로 특채하였다.
대사간은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여 임금에게 바른 말로 충간(忠諫)하는 일을 맡은 매우 촉망 받는 자리였다.
성종은 이세좌 아버지 형제들의 그늘을 의식하여 이세좌를 달리 여긴 것 같았다. 이어 운명의 형방승지를 거쳐 성종16년(1485) 이조참판이 되고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지니, 실로 문과급제 8년만에 이룬 대단한 신분상의 광영이었다.
성종25년(1494) 성종이 숨지자 이세좌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성종의 국장의례 및 왕릉 축조 책임을 맡았고, 이어 연산군 즉위 초에 한성부판윤을 거쳐 호조판서에 올랐다.
뒤에 여진족 방어 순변사(巡邊使)로 파견 되어 활약했고,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와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는데,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 무렵 이세좌의 아들들도 모두 출세가 빨라, 큰아들 수형(守亨)은 의정부 정4품 사인(舍人), 다음 수의(守義)는 예문관의 정9품 검열(檢閱), 또 다른 아들 수정(守貞)은 홍문관의 정6품 수찬(修撰)으로 있어, 신료들의 부러움을 샀는데, 유독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유자광(柳子光)은 이세좌를 시기하여 틈만 나면 그를 헐뜯으며,「이세좌의 약사발 심부름」을 머릿속에 담아 때만 노리고 있었다.
또한 이세좌도 그 일이 항상 머리를 짓눌러 왕 앞에만 가면 오들 오들 떨렸다. 술을 즐기는 연산군이 벌린 어느날의 술자리에서 이세좌는, 왕이 주는 술잔을 받아 단숨에 비우질 못하고, 손이 떨리는 바람에 잔에 남아있던 몇 방울 술을 왕의 옷자락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임사홍과 유자광의 비벼 꼰 모함으로, 이세좌를 흘겨 보던 연산군은 즉각 그를 불경죄로 다스려 옥에 가뒀다가 귀양 보내 버렸다.
무안·온성·평해 등지로 옮겨 다니며 유배살이를 하던 이세좌는, 이듬해 운명의 『폐비 윤씨의 죽음』에 그가 했던 역할이 들어나니 여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갑자사화가 터진 것이다. 폐비가 죽던 날 저녁의 아내 예상이 적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다음 유배지 남해로 가던 참에, 오늘날의 경상남도 하동 진교면 양포리에서, 연산군이 보낸 금부도사를 만나 밧줄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고 말았다.
나이 60세, 물론 세 아들 모두 죽어야했고, 아녀자들은 남의 집 종으로 목숨을 부지했었다. 다행이랄까. 너무 어려 죽음 만은 면했던 그의 손자들 이윤경(李潤慶)·준경(浚慶)·연경(延慶) 등이, 바뀐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 그 가운데 이준경은 선조때 영의정에 오르기도했다. 역시 뿌리 깊은 가문은 생명력이 있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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