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90>역사를 비튼 잎사귀
(주)하동신문
중종14년(1519) 가을이 깊어 가던 11월 15일 밤, 대사헌 조광조(趙光祖)가 자다가 의금부 관원들에게 묶여 끌려 갔다. 요즘으로치면 감사원장쯤되는 고위인사가 체포당한 보통이 넘는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조광조는 순간적으로 언관(言官)들의 탄핵으로 옷을 벗은 전 좌참찬 홍경주(洪景舟), 예조판서 남곤(南袞), 역시 자리를 빼앗긴 전 형조판서 심정(沈貞) 등이 「기어이 일을 꾸몄구나」하는 생각에 젖었다.
도학(道學) 정치가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정치철학으로 삼아 나라를 한번 바꿔 보려했던 조광조의 꿈이 허무하게 깨져 역사의 물줄기가 틀어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조광조의 본관은 한양, 아버지는 어천촬방 조원강(趙元綱), 명성이 지나치게 높고 너무 급진적인 조광조에게「신중하라!」며 걱정했던 좌참찬 조원기(趙元紀)가 곧 그의 숙부였다.
김굉필(金宏弼)이 평안도 희천에 귀양 살 때 조광조가 찾아가 배웠다. 그때 나이 17세, 어느날 김굉필이 어머니께 보내려고 꿩을 한 마리 구해 말리고 있었는데, 그만 고양이가 물고가 버렸다. 김굉필이 꿩을 지키던 하인을 불러 낯빛을 붉혀 심하게 꾸짖자 조광조가 말했다.
“봉양하려는 정성은 비록 간절하오나 군자는 말과 기색을 살펴 가려야 하온데, 소자가 보기에 의혹(疑惑)스럽습니다”
스승의 과한 꾸지람을 지적한 것이었다. 김굉필은 즉각 뉘우치고 조광조 앞으로 다가 와서 손을 잡고 말했다.
네말이 맞다! 네가 내 스승이구나!”
조광조는 이처럼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그가 달빛이 드리운 의금부 뜰을 둘러 보니 함께 마음을 모아 일했던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김정(金淨), 대사성 김식(金湜), 부제학 김구(金絿), 사헌부장령 기준(奇遵), 좌승지 박세희(朴世憙), 동부승지 박훈(朴薰) 등 등. 모두가 조광조가 창안하여 뽑았던 현량과(賢良科) 출신의 참신한 신료들이일시에 구속되어 꿀린것이었다.
훈구세력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이 조광조 일파의 개혁세력에 칼을 들이 대게 된 결정적 사건은 이른바「공신삭훈(功臣削勳)」이었다.
중종반정 공신들을 정국(靖國)공신으로 이름 지어 103명을 책록, 나라에서 특별 대우를 하는데, 엉터리가 많고 이로 인한 국고 낭비가 심했다. 이에 개혁세력들은 공신 재정비를 내 세워 홍경주, 남곤 등 의심스런 억지 공신 78명을 삭훈하는데 성공하였다.
공신 작호를 잃은 훈구파들은 격분, 마침내 조광조 등을 몰아 내기위한 꾀를 모색, 중종에게 조광조를 무고,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중종의 후궁 가운데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있었다. 홍경주는 딸에게 일러 먼저 중종의 마음을 찔렀다.
“세간에 민심이 함빡 조광조에게 쏠렸다 하옵니다. 광조는 중신들을 모두 쓸어 내고 마음대로 국사를 손에 쥐려한다고들 합니다. 지금 조정은 온통 조광조 무리들이 득세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한편 개혁파들의 탄핵으로 쫓겨난 심정은 서로 힘을 주고 받던 경빈 박씨 궁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꿀로「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을 쓰니 벌레가 꿀맛을 따라 잎을 갉아 먹어 기묘한 글자가 새겨졌다.
드디어 경빈 박씨가 요망한 글자의 잎사귀를 들고 중종을 압박하였다.
“마마! 머지 않아 조씨 나라가 된다고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조광조를 좋아해서 광조가 마음대로 정사를 주물럭 거리니, 머지 않아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임금의 체통을 지키느라 이렇게 대꾸하였다.
“어찌 이씨 나라에 조씨가 왕이 된단 말인가?”
경빈 박씨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되 받았다.
“마마도 답답 하옵니다. 조씨 나라가 된다는 것은 임금은 이름 뿐이고 정사는 모두 조씨가 좌지 우지한다는 뜻 아니옵니까? 그러다가 상감께서 조씨 말을 듣지 않으시면 왕을 갈아 치우게 될 것 아니옵니까?”
말을 마치자 경빈은 문제의 나뭇잎을 중종의 눈앞에 들이댔다. 「走肖」는 곧 「趙」아닌가.
중종은 화들짝 놀랐다.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있는가?
어떻게 나무 잎사귀에 그런 글이 새겨진단 말인가. 이는 필시 하늘의 조화가 아닌가? 왕을 갈아 치우는 정변으로 왕이 된 중종은 「갈아 치우게 될 것」이라는 경빈의 말에 그만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마침내 중종은 훈구 세력을 동원, 조광조 일파를 일망 타진하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기묘하게 꾸며진 기묘(己卯)사화!
조광조(38세), 김정(34세)은 귀양 보내졌다가 사약을 받아 숨졌고, 김식(38세)는 귀양지에서 탈출했다가 자결하였다. 겨우 목숨을 건진 동지들은 이후 기를 펴질 못한채 흩어지니모처럼의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조광조와 중종은 동상이몽(同床異夢)관계였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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