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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이야기 5>

by 까망잉크 2018. 4. 30.

<조선왕조 뒷이야기 5>(주)하동신문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찍는 인장이 곧 국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1894년 갑오경장 때, 비로소 자주국가 상징으로 「大朝鮮國寶」와 「大朝鮮大君主之寶」라 새긴 두개의 국새를 만들어 대 내외 문서에 가려 사용하였다. 3년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국새를 변경, 「大韓國璽」?「皇帝之璽」?「皇帝之寶」등 8개의 국새를 제작하여 문서의 용도에 따라 가려 사용하였다. 
정부수립 후인 1949년 5월, 신생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새가 만들어지니, 곧「大韓民國之璽」였고, 현행 사용 중인 국새는 1970년 3월 한글전용 정책에 따라 제작한, 한글 전서체의「대한민국」을 가로로 새긴 사방 7cm의 정방형 크기의 나라 인장이다.
고려와 조선의 국새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록상으로 고려 명종2년(1172)에 비로소 국새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국새는 중국 금나라에서 만들어 보내 온 것이었다. 이후 중국을 지배하던 왕조가 바뀔 때마다 고려에 국새를 만들어 주며 쓰게 했는데, 요?원?명나라 등을 거치는 동안 수차례 고려왕의 인장을 만들어 보내 사용하게하였다. 
고려 공민왕19년(1370), 새로 중원을 차지한 명나라 태조가 제작하여, 공민왕에게 보낸 국새는 「高麗國王之印」이었다. 태조 즉위년(1392)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 주도록 여러 차례 청했으나 명나라는 들어 주지 않더니, 태종3년(1403) 명나라 황제 성조(成祖)가 비로소 「朝鮮國王之印」이라 새긴 금인(金印)을 보내왔다. 이를 대보(大寶) 또는 어보(御寶)라하여 인조14년(1636)까지 대 중국 외교문서에만 사용하였다. 이후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서자 곧 청나라에서 보내준 국새로 바뀌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고려나 조선을 낮게 여겨 「璽」또는 「寶」를 넣지 않고 항상 「印」을 새긴 국새를 만들어 보내 쓰게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조선 조정은, 대중국 외교문서에만 중국에서 보내 준 국새를 사용하고, 대 일본 외교 문서와, 국내 통치에 쓰는 국새는 모두 다른 어보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비록 중국을 상국으로 받드는 처지였으나, 자주적 왕권을 상징하는 국새는 따로 만들어 쓰려는 의지에서 비롯 된 것이라 짐작된다.
예컨대 대 일본 외교문서에는 「昭信之寶」라 새긴 국새를 찍었고, 왕의 교서와 인사 발령장인 교지에는 「施命之寶」, 과거 관련 문서에는 「科擧之寶」를 찍었다.
이 외에도 특수 목적의 어보들이 여러개 있었으니, 예를 들면 서적을 반포, 하사할 때 관련 문서에 찍은 「宣賜之記」, 왕이 지은 글에 찍는 「奎章之寶」등이 그것이다.   
흔히 옥새(玉璽)라 했던 여러개의 국새는 도승지(都承旨-대통령실장) 책임아래 상서원(尙瑞院-옥새관리청)에서 제작, 보관, 관리했는데, 갑오경장 때 모두 폐기 되었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는 관례에 따라 명나라에 국새를 만들어 보내주기를 수차례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왕자의 난」을 겪고 분에 못이겨 옥새를 지닌채 함흥으로 가 버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나름대로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자신이 원했던 국새는 가지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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