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3(주)하동신문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살기가 어렵다는 북한 주민들은 <이밥에 고깃국>이 소원이라한다. '이밥'은 물론 '쌀밥'을 말한다. ‘쌀밥’을 어떤 연유로 ‘이밥’이라했을까? 여기에는 이런 설이있다. 고려말에 권력을 잡은 이성계(李成桂)가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서민들도 자기 토지를 가지고 농사를 지어 쌀밥을 먹을 수있게하였으니, 그 밥이 곧 ‘이성계가 먹게한 밥’이라 하여 줄여서 ‘이밥’이라했다는 것이다.
고려 공양왕 즉위 2년차 되던 해(1390) 11월 이성계는 영삼사사(領三司事)라는 관직에 올라, 오늘날의 이른바 3권을 장악하고, 이듬해 1월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까지 겸해 군사통수권까지 거머 쥐었다. 막강한 권력을 쥔 이성계는, 극도로 문란해진 토지제도 때문에 굶주리는 농민들의 참상을 보고 느낀 나머지 드디어 개혁의 칼을 뽑았다.
같은해 5월,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단행, 권문세가의 장원(莊園)으로 전락한 전국의 농지를 몰수, 국유화하여 경작 능력이 있는 농민들에게도 농지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호족들이 차지한 토지의 농사나 뼈빠지게 지어 주고 잡곡 몇 섬씩 얻어 먹는 만년 소작인이라는 굴레를 벗게하였으니, 이른바 과전법(科田法)시행이었다. 이리하여 농민들도 지급 받은 농지에서 자작으로 생산한 쌀로 밥을 지어 먹게 되었으니, 그 ‘쌀밥’이 곧 ‘이성계가 먹도록 해준 밥’이라하여 ‘이밥’이라 이름 지었던 것이다. 그 시대 사회 형편으로는 과히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몇 년전 5월, 경기도 용인에서 열린 문화제 행사 때였다. 시 중심가에서 행사장으로 나가는 어느 도로변에 싱그러운 이팝나무가 쌀밥 덩이를 주렁 주렁 매단 모습의 가지를 늘어뜨리고 군락을 이루고있어 보기가 좋았다. 나는 하동사람이라 관내에서 가끔 보는 이팝나무에 눈이 익어 알 수가 있었는데, 모두가 용인 사람들인 일행 가운데는 그 나무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누군가 “저게 무슨 나문가?”하고 혼잣말처럼 의문을 제기했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한참 뒤 내가 자신이 없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게 남부지방에서는 쌀밥나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보통 아마 이팝나무라고 하는 그 나무가 아닌가 봅니다”
‘쌀밥’을 ‘이밥’이라했고, 쌀밥이 주렁 주렁 열린 것처럼 보이는 나무라하여 ‘이밥나무’라 했는데, 번음되어 정해진 나무 이름이 바로 ‘이팝나무’라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나무에 대한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아는 체 한다는 생각들을 할까 싶어 더는 말하지 않았고, 심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나무의 싱싱한 꽃무리가 보기 좋다는 생각들에 잠겨 들기만 했지 나무의 내력에 대하여 더는 알려고 하지 않은 눈치들이라 나도 입을 다물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이런 문헌의 기록도 있다.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인 이팝나무는, 입하(立夏) 무렵에 꽃이 만발하므로 ‘입하나무’라 이름했는데 변음으로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과,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어 쌀밥을 먹게 된다하여 이밥(이팝-쌀밥)나무라 했다는 설, 또 한가지 꽃이 만개하면 나무를 덮은 꽃이 쌀밥을 연상시키므로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머리에 쌀밥을 떠오르게하는 이팝나무는, 한자어는 육도목(六道木)이라하고, 호남지방에서는 늦은 봄 입하 무렵에 꽃이 핀다하여 입하목(立夏木) 이라 부르며, 못자리 할 때 꽃이 활짝 피면 풍년이 들고, 꽃이 생기가 약하면 흉년, 시름 시름 피면 가뭄이 온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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