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왕조 뒷이야기>7 이성계와 최영(崔瑩)(주)하동신문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고려 말엽 무장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낸 이성계가 우왕14년(1388)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국무총리급)에 올랐는데, 그날밤 꿈에 한 도사가 나타나 금으로 만들어진 자(金尺)를 주며 이렇게 말하더라 했다.
“경복흥(慶?興) 시중은 청백하나 이미 늙었고, 도통사 최영은 곧지만 조금 어리석으니, 이것을 갖고 나라를 바로 잡을 사람은 공이 아니고 누구리요!”
평소에 품었던 생각이 잠자는 동안에 나타나는 환상이 곧 꿈이 아니던가.
경복흥은 이성계가 지리산 일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등, 무공으로 명성이 들어날 즈음 고려 조정의 최고 직위에 올랐던 정계의 거물이었으나, 이미 노쇠하여 이성계와는 세대 차가 컸고, 최영은 이성계보다 나이 20세 연장으로 항상 이성계가 깍듯이 받들었던 상관이었으나,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조금 고지식하여 장차 걸림돌이 될 것 같았다.
최영의 본관은 창원(昌原), 그의 선대에 고려태조를 도와 공신이 된 최준옹(崔俊邕)이 있었고, 그 아래로 평장사(平章事-부총리급)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이 있어, 최영은 곧 최유청의 5세손,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은 사헌규정(司憲糾正-감찰부서의 종6품직 어사)이었다.
최영은 공민왕 초기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일약 대호군에 올랐고, 원나라가 중원에서 일어난 반군과 다툴 때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니, 최영이 39세 나이로 2000여명의 장병을 거느리고 중국에 들어가 용맹을 떨쳐 원나라 장수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렀다. 이듬해 귀국한 최영은 고려가 배원정책을 쓰게 되자, 압록강 부근에서 원나라 군사들을 대거 격파하였고, 이후 대거 출몰하는 홍건적을 무찔러 평양과 개성을 지켜냈다. 뿐만 아니라 삼남 지방은 물론 평안도 연안까지 출몰하여 소란을 피우던 왜구를 종횡무진 8도를 누비며 물리치니, 그의 기개는 고려의 튼튼한 버팀목이었다.
우왕 14년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에 오를 때 최영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이성계보다 한 단계 윗자리에있었는데, 최영은 그때 나이 이미 73세 노령이었고, 그해 그의 딸이 우왕의 비(妃)가 되어 영비(寧妃)에 봉해지니, 그는 왕의 장인으로 신분상 이성계와는 견줄 바가 아닐 만큼 높아졌다.
그해에 마침 신흥 명나라가 오늘날의 함경남도와 강원도 접경지역 동해바다에 접한 안변(安邊)의 이북 땅은 본래 원나라 땅이므로, 이제 명나라가 관할하겠다며 철령위(鐵嶺衛)를 설치, 만주의 요동에 예속시키려한다는 통보를 해오니, 격분한 최영은 지난날 중원에서 한번 겨루어 본 저들의 군사력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에서 요동정벌을 획책하였다.
이리하여 자신은 최고 지휘관이 팔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총력을 기울려 「요동정벌」이라는 역사적 거사를 시작하였다. 최영은 사위인 우왕과 함께 평양까지 올라가 군사를 독려하였으나, 몇 차례 거듭 요동정벌 불가론을 건의했던 이성계의 반발로, 「위화도 회군」이라는 역류를 맞고 말았다.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는 창끝을 반대로 돌려 서울로 돌아와 궁궐을 에워싼 채, 우왕에게 최영을 처벌 할것을 청했다. 그러나 우왕이 듣질 않자 그를 왕위에서 들어내고, 이제 겨우 아홉 살 된 왕의 아들을 옥좌에 앉히니 이가 곧 철이 덜든 창왕(昌王)이었다. 1388년 6월 3일에 벌어진 촌극이다.
최영은 이성계 군사들 손에 끌려 나오는데, 차마 우왕의 손을 놓지 못해 한참을 붙잡고 울다가 두 번 절하고 작별을 고했다. 끌려 나온 최영을 맞은 이성계는 늙은 호랑이 처럼 노쇠한 충신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착잡했다.
“이같은 사변은 나의 본 뜻이 아니요! 그러나 요동을 치는 일은 대의를 거슬릴 뿐만 아니라, 나라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므로 부득이 이리된 것이니, 잘 가시오! 잘가시오!”
하고, 서로 마주 붙잡고 한참 울다가 영영 헤어졌다.
그 길로 최영은 고향인 경기도 고양땅에 귀양 보내 졌다가 오늘날의 마산, 충주 등지로 옮겨졌고, 같은 해 12월 개경으로 압송 되어, 이른바 공요죄(攻遼罪 -요동을 치려한 죄)를 둘러쓰고 목이 베어져 죽었다. 나이 73세에 이른 최영은 죽음에 이르러 얼굴빛이나 말소리가 전혀 변함 없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가 평생에 만약 탐욕의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
「요동 정벌」이 사적인 탐욕 때문이 아니었음을 강하게 피력하고 순순히 칼을 받았다. 그의 말대로 고양땅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질 않은 벌거숭이라 사람들은 적분(赤墳)이라 부른다. 그의 주검이 한동안 길가에 버려져 있었는데, 길가는 사람들 마다 모두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고 지나갔다.
이듬해 12월 우왕은 강원도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같은 날 요승 신돈(辛旽)의 핏줄이라는 오명을 쓴 채 죽음을 당하니, 우왕은 25세, 창왕은 10세였다. 이성계는 개국 6년 만에 최영을 챙겨 무민공(武愍公)으로 시호를 내려, 약간은 융통성이 없어 보였던 선배 맹장의 넋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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