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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이야기 6>

by 까망잉크 2018. 5. 1.

 (주)하동신문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고려 공양왕4년(1392) 6월, 기울어져 버린 고려 왕조의 실권자 이성계(李成桂)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은, 진작부터 개혁을 꿈꾸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한 마음이 되어, 역성 혁명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 이성계는 정치적 동반자였던 정몽주(鄭夢周) 등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없어 주저하니 속이 탔다. 고심 끝에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둘째 부인으로 맞은 강씨(康氏) 부인을 끌어 들여 아버지를 설득하도록 부탁했다.
이방원으로부터 자초지종 돌아가는 시국을 전해 들은 강씨부인은 발벗고 나서서 이성계를 설득,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놨다. 일찍이 공민왕때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강씨는, 어마 어마한 권문세가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지모까지 갖춘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다. 
이성계의 장인이 된 강윤성은 관직이 판삼사사(判三司事-국무총리급)로 그 무렵 국정의 중심에 있었고, 그의 아우 강윤충(康允忠)도 판삼사에 이르렀으며, 또 다른 아우 윤휘(康允暉) 역시 힘깨나 쓰는 권력자였는데, 강윤휘의 아들로 벼슬이 상장군(上將軍-군사령관)이던 강우(康祐)가 이성계의 큰아버지 이자흥(李子興)의 사위였으니, 이를테면 이성계는 조정을 쥐고 흔드는 권부의 사돈댁 규수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 들인 셈이 되었다.
강씨 부인이 이성계와 만난 일에 대하여 이런 설화가 전해 온다.
군부의 실력자 이성계가 어느날 황해도 곡산 땅에서 사냥을 겸한 무예를 익히다가 갈증을 느껴 용연(龍淵)에서 물을 마시고자했다. 마침 그때 근처 개울에서 빨래를 하던 처녀 강씨가 재빨리 바가지로 용연의 물을 떠, 옆의 버드나무 잎을 훑어 바가지에 띄워 이성계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물 바가지를 받아든채 그는 빼어난 용모의 규수에게 물었다. 
“물에 버들잎은 띄운 까닭이 무엇인가?”
“보아하니 심하게 목이 마르신 것 같은데, 찬물을 급히 마시면 체하실까 싶어 그랬습니다. 버들 잎을 불면서 천천히 드십시오”
이성계는 처녀의 슬기에 감복했다. 그날로 그는 처녀의 집을 찾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처녀가 곧 당대의 최고 권력가 강윤성의 딸이 아닌가. 강윤성 역시 이성계의 명성을 익히 아는 지라 찾아든 귀인을 맞아 하룻밤을 새우게하고, 결국 장차의 왕재를 사위로 삼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권문세가의 사위가 된 이성계의 입지는 한층 강화 되었다. 처남이 된 강씨 부인의 오빠 강순룡(康舜龍)이 찬성사(贊成事-부총리급)에 올라 든든한 배경이 되었고, 공민왕 때의 권력자 신돈(辛旽)의 근친으로 판서에 오른 신귀(辛貴)와 동서간이 되기도 했다. 뒤에 신돈의 몰락과 함께 신귀도 죽음을 당했지만, 그의 아우와 아들들은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에 오르고, 그들 영산신씨 가문이 조선조의 명문으로 떠 오르는 계기를 만들었다.
우리 하동에도 고전면 신덕마을에 속칭 「왕비샘」이 있는데, 여기는 청년시절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버들 잎 띄운 물을 올린 유씨 처녀가, 뒤에 왕건의 총비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있어 신기한 생각이 든다.
이방원은 강씨부인에게 아버지를 설득하도록 부탁하고, 곧 고려의 기둥 역할을 하던 정몽주를 제거한 뒤, 아버지에게 대세를 굳혔음을 보고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소리 질렀다. 
“우리집이 평소 충효로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함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이에 이방원이 대꾸하였다.
“저들이 우리 집을 모함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하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성냄은 더욱 높아졌고 안절부절했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던 강씨가 얼굴 빛을 가다듬고 남편을 설득하였다.
“공은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렇듯 심합니까?”
강씨의 태연하고 당찬 태도에 이성계도 어쩔 수 없었다. 그로부터 석달 후인 7월 17일 그는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니, 그의 창업에 8월에 조선 최초의 왕비에 봉해진 현비(顯妃) 강씨의 내조의 힘이 컸다고 하지 않을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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