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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13

by 까망잉크 2018. 5. 17.

<조선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⑬(주)하동신문 17 
                                                         정연가 하동문화원장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길손 눈물겨워 하노라
태종(이방원)의 스승 원천석이, 망국 고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아 남긴 시조다. 원천석은 고려 충숙왕17년(1330)에 태어나 한시대를 풍미(風靡) 원주 원씨 중시조다. 자를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고려 말의 정용별장(精勇別將) 원열(元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원윤적(元允迪)의 아들이다. 그는 타고난 재질로 촉망을 받았으나, 고려 말기의 어지러운 세태를 피해, 강원도 치악산에 숨어 농사일에 파묻혀 부모봉양을 일삼아 살았다. 그는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렸는데, 주거 지역의 군적(軍籍)에 이름이 올라, 혼자 자유롭게 살 수없는처지가 되니, 부득이 과거에 나가 단번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벼슬길이 틔었다. 그러나 원천석은 역시 벼슬을 마다하고 이색(李穡) 등 당대의 석학들과 어울려 학문을 즐겼는데, 이 무렵 그는 이방원(李芳遠)의 스승이 되어, 장차 왕좌에 오를 잠룡과 인연을 엮었던 것이다.
정종2년(1400) 11월 13일, 조선 세 번째 왕위에 오른 태종은, 일찍이 왕자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에게 관직을 내리고자 누차에 걸쳐 거듭 원천석을 불렀다. 그러나 원천석은 한사코 응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태종은 일부러 강원도 지방 순유(巡遊) 일정을 마련하여, 옛 스승의 거처를 찾아 기어이 그를 만나 보고자하였다. 한데 원천석은 미리 소문을 듣고 집을 비운채 뒷산으로 몸을 피해 버렸다.
태종은 허탈한 마음에 젖어 근처의 한 바위에 올라, 원천석의 집을 지키는 노파를 불러 준비해 갔던 선물을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헛 걸음인 채 환궁한 태종은, 원천석의 아들 원형(元泂)에게 풍기현감 벼슬을 내려,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태종이 올렀던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이름 지으니,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그 바위였다.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 주고 상왕으로 앉아있을 때였다. 태종은 미련이 남아 다시 원천석을 불렀다. 원천석은 권좌에서 물러난 태종의 심중을 헤아려, 평민복 차림으로 대궐에 들어가 태종을 배알하였다. 그 자리에서 태종은 장성한 여러 손자들을 불러내 소개하였다.
“이 얘들이 내 손자들인데 어떠하오?” 하고 물으니, 원천석은 하필 수양대군을 가리키며 서슴없이 말했다.
“이 왕손이 할아버지와 똑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가 있도록 잘 가르쳐야 하겠나이다” 하며, 과격한 태종의 성품을 꼬집었다.
원천석이 산중에서 끝내 출사를 마다한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서도 엿볼 수있다. 서두에 소개한 시조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다.
원천석은 고려 말기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을 그대로 기록한 서책 여섯권을 나무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이른바 말엽의 고려야사(野史)였다. 그는 임종때 유언하기를 “자손 가운데 성인(聖人)이 아닌 자는 결코 이 서책을 열어보지 말라!” 하고 단단히 타일렀다. 
후대에 들어 한 자손이 호기심에서 상자를 열어 서책을 꺼내 읽어 보고는 크게 놀라 「우리 가문이 멸족 당하겠구나!」싶은 생각에서, 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사람들은 원천석이 쓴 야사는, 고려 말에 빚어졌던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기에, 조선 개국 공신들의 입김으로 다듬어진 <고려사>와는 해와 별, 무지개 이상의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 말했다. 우왕과 창왕이 쫓겨나 죽은 일, 최영(崔瑩)장군을 죽인 일, 이색이 장단으로 귀양간 일 등등, 일련의 사건들이 원천석의 시문에 꾸밈없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자손이 기겁을 하고 불태워 버린 그 야사는, 분명히 이긴자의 입맛에 맞춘 정사(正史)가 아닌 진실 그대로였다고 짐작했다. 
옛날 중국 진나라의 사관 동호(董狐)가, 조돈(趙盾)이 그의 임금 영공(靈公)을 죽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일을 두고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세간에는 원천석을 『동호직필(董狐直筆)』로 쳤고, 바위에 눌린 죽순이 비껴 솟아 나온 형국이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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