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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⑭> 개국 1등공신

by 까망잉크 2018. 5. 20.
<조선왕조 뒷 이야기 ⑭> 개국 1등공신(주)하동신문  

                                                  정연가 (하동문화원장)

조선은 개국에 성공한지 한달 뒤인 1392년 8월 2일, 공신도감(功臣都鑑)을 설치하고, 창업에 힘을 보탠 신하들의 공적을 살펴, 무게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공신을 뽑았다. 9월에 결정된 공신은, 1등에 배극렴(裵克廉) 등 15인, 2등은 윤호(尹虎) 등 11인, 3등은 이직(李稷) 등 16인, 그런데 의문스럽게도 개국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방원·정도전 등은 빠졌다. 다분히 정략적 냄새가 풍기는 공신책록이었다. 
공신은 절대적인 특혜가 주어졌다. 1등 공신의 경우, 150~220결의 농토를 주고, 15명~30명의 노비를 지급했다. 뿐만 아니라 반역죄가 아니면 처벌을 하지 않으니, 살인을 해도 벌을 받지 않았다. 또한 자식에게는 그냥 벼슬도 주어졌다. 뒤에 정권을 잡은 태종은 논란 끝에 자신과 그의 형 방의(芳毅)·방간(芳幹)을 1등 공신에 끼워 넣기도하였다. 처음 책록 된 조선개국 1등공신의 면면을 살펴본다. 
【배극렴】: 고려때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고, 중군총제사를 거쳐 최고관직인 문하시중에 올라, 이성계의 창업에 가담, 개국 당시의 최고관직인 문하좌시중을 역임하고, 태조가 즉위한 넉달 뒤인 1392년 11월26일 죽었다.
【조준(趙浚)】: 충목왕2년(1346) 출생, 평양조씨, 고려때 대사헌으로 이성계와 함께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태조때 영의정에 올랐다. 【김사형(金士衡)】: 고려 충혜왕 복위2년(1333) 출생, 본관은 안동, 고려때 개성부윤(특별시장) 등을 역임하고, 이성계 추대에 가담, 뒤에 영의정에 올랐다가 태종7년에 죽음. 【이제(李濟)】본관은 성산, 신덕왕후 강씨 소생 공주와 결혼, 태조의 사위가 되었다., 고려때 밀직제학을 역임하고, 개국 직후 전법판서(법무부장관)에 올랐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화(李和)】: 이성계의 배다른 아우, 이방원에게 정몽주(鄭夢周) 살해를 사주, 태종때 영의정에 올라 대군(大君)에 봉해졌다. 【정희계(鄭熙啓)】: 본관은 경주,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대호군에 올랐고, 이성계의 개국에 가담, 판한성부사(서울특별시장)가 되었다. 【이지란(李之蘭)】: 본성은 퉁, 여진인,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 속칭 퉁두란,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의 친정 조카사위, 공민왕때 귀화하여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휘하에서 이씨(李氏)성을 하사 받아 청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개국 뒤에 문하시랑 찬성사에 올랐다. 【남은(南誾)】: 본관은 의령, 고려때 왜구 격퇴에 공을 세우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주장한 공으로 밀직부사에 올라 세자 방석(芳碩) 편을 들다가,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이방원에게 살해 당했다. 【장사길(張思吉)】: 본관은 안동, 위화도 회군에 가담한 이성계의 심복, 공양왕을 몰아내고 옥쇄를 받들어 태조 옹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직이 참찬문하사에 이르렀다. 【정총(鄭摠)】:본관은 청주, 고려 우왕때 문과에 장원급제,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개국 후에 예문관춘추관대학사로 고명(誥命) 및 인신(印信)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표문(表文)이 불손하다는 트집이 잡혀 명나라에 억류되어 죽으니, 나이 40세였다. 【조인옥(趙仁沃)】: 본관은 한양, 전법판서로 정도전 등과 배불숭유 정책과 함께 전제개혁을 단행하였다. 개국 뒤 이조판서에 올랐다.【남재(南在)】: 남은의 형, 개국에 공을 세웠으나 포상을 피해 숨었다가 태조에게 처소가 알려져 다시 출사하였다. 태종때 영의정에 올랐다. 【정탁(鄭擢)】: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에 이르렀다가 조선 개국과 함께 성균관대사성에 올라 이방원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하고 뒤에 우의정이 되었다. 【김인찬【(金仁贊)】: 양근김씨(楊根金氏) 시조, 함경도 북청의 토호, 밭에 김을 매다가 이성계가 뽕나무 위의 새 두 마리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감탄,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위화도회군에 가담하고, 밀직부사가 되었다. 개국 직후 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에 올라 태조의 근위병을 통솔하다가 곧 죽었다. 사후에 공신에 추봉 된 것이었다. 【조박(趙璞)】: 본관은 평양, 이방원의 동서, 고려때 삼사좌윤, 개국 뒤에 호조판서, 동북면도체찰사 등에 올랐으나, 세종때 불교를 신봉했다는 탄핵을 받아 공신 녹권을 소각 당했다.
제왕의 사위, 남재·남은 형제 등, 팔자가 보장된 일등 공신들이긴 해도, 세상따라 운명이 엇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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