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완조 뒷이야기> 12 세자 땜에 못 살아!(주)하동신문
정연가 하동문화원장
태조5년(1396) 8월 13일,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康氏)가, 한양 천도 2년만에 세상을 떴다. 언제 출생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나이를 알수 없으나, 첫 아들 무안대군 방번(芳蕃)이 16세, 둘째 아들 의안대군 방석(芳碩)은 14세, 갓 시집 보낸 딸 경순공주가 있었고, 남편인 태조 이성계는 나이 62세였으니,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한 것 같다.
강씨는 작은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은 이후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기라성 같은 태조의 본부인 한씨 아들들이 늘 마음에 걸렸고, 11세 어린 몸으로 세자에 책봉된 방석의 신상이 온전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서, 앉으나 서나 초조한 마음 가누기가 힘겨운 하루 하루였다.
게다가 세자빈으로 맞아 들인 현빈(賢嬪) 유씨(柳氏)가, 남편인 방석이 내 몰라라 하는 통에, 그만 내관을 꼬드겨 사통한 사건이 벌어지니, 이방원 측에서 「옳다구나」싶어 문제를 확대 발설, 대궐안에 큰 소란이 벌어지고 말았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구겨져버린 강씨는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결국 현빈 유씨는 쫓겨나 죽고, 비어 버린 세자빈 자리를 급히 채우느라 세자의 보호막인 정도전(鄭道傳)을 재촉하여, 대장군 심효생(沈孝生)의 딸을 두 번째 세자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세자 방석은 전혀 달라진 게 없이 강씨의 속을 썩였다. 처음에는 제왕의 자질을 닦느라 서책을 가까이하다보니, 자연히 내외간이 멀어져 빈궁이 바람이 났던 것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세자는 첫 여자를 불쌍히 여기는 심경에 빠져 방탕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사내 구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었다. 까닭에 자학(自虐)에 빠진 세자는 몰래 궐밖에 나가 몸을 가누지 못 할 지경으로 술을 마시는 날이 자주 있었다. 하루는 세자의 이런 천부당 만부당한 짓을 두고 분통을 터뜨린 강씨가, 앉은 자리에서 쓸어져 혼절하고 말았는데, 급히 달려온 어의(御醫)는 맥을 짚어보고 심화병(心火病)이라며,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말을 할뿐이었다.
강씨의 병은 접점 악화되었으나 세자는 모후의 바램과는 정 반대로 치달았다. 결국 왕후는 심장 깊숙이 병을 담아 한 시절의 영화를 뒤로한 채 저승 문턱을 넘고 말았던 것이다. 순전히 세자로 인해 얻은 병을 이겨내질 못한 죽음이었다.
강씨가 죽은 이태 뒤인 태조7년(1398) 8월 26일, 마침내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 의해, 강씨 혈육들은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은 귀양길에서 살해되고, 사위인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李濟)도 죽음을 당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남편을 잃은 경순공주는, 아버지 태조의 권유로 여승이 되어 일생을 보내야하는 신세로 전락, 살아 남은 강씨의 오직 한점 혈육이었다.
세자 방석의 장인 심효생은 관직이 이조전서(吏曹典書-인사담당장관)를 거쳐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다가, 50세 나이로 살해 당하니, 왕의 국구가 될 뻔했던 꿈이 비참하게 깨지고 만 셈이었다.
강씨는 신덕왕후에 봉해져 오늘날의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능이 마련되니 능호가 곧 정능(貞陵)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강씨를 왕비로 치질 않았다.
1400년 11월 13일 왕위에 오른 태종(이방원)은 이를 갈며 벼르던 바라, 아버지 태조가 눈을 감기가 바쁘게 왕비 강씨 위패를 끌어 내려, 서모(庶母)의 예로 대하도록 격하시켜 버렸다. 조선초기의 무자비한 서얼 차별 풍속은 태종의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악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강씨의 무덤을 파헤쳐 옮겨버리고, 왕능 앞에 건립한 정자각(丁字閣)도 헐어 버렸는가 하면, 능침 주변의 석물들을 뜯어 실어내 돌다리를 만들어 뭇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해버렸다.
그로부터 250여년이 지난 현종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주청으로, 비로소 정능은 복구되어, 오늘날 서울 성북구 정능동에 자리하고 있다. 송시열의 주장은 신덕왕후 강씨가 조선의 첫 왕비임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첫부인이 한씨였다고는 하나, 그녀는 조선 개국 이전에 이미 죽어, 국모로 책립 된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론대로라면 강씨의 앙칼진 주장 처럼, 한씨 소생 아들들은 제대로 갖춰진 왕자들이 아니라는 말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데, 강씨 소생 아들이 세자가 된 것은, 이방원의 눈으로는 차려진 밥상을 가로챈 「역천(逆天)」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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