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⑪
정연가 하동문화원장
조선은 개국 2년 뒤인 1394년 10월 25일, 일단 한양으로 천도하였다가, 정종 때인 1399년 3월 7일 도로 개경으로 이궁하였다. 그러나 왕씨들의 흔적을 벗어난 새 왕궁을 원하는 태조의 뜻을 받들어, 정도전과 왕사(王師) 무학대사는, 한양에 천하의 길지를 찾아 왕궁을 짖고, 태종5년(1405) 10월 11일 역사적인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무학대사의 속명은 박자초(朴自超), 본관은 죽산, 고려 때의 유명한 박서(朴犀)장군이 그의 5대조로, 경상도 합천 삼가에서 태어난 고승이다. 태조 이성계와는 꿈 해몽으로 인연을 맺아, 한양에 새 도읍터를 찾아 헤매다가 만난 한 노인이, “십리만 더가라”는 말을 듣고 가서 마침내 도읍터를 찾았다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 유래를 남기기도 하였다.
새 도읍지에 세울 궁궐을 설계하는데, 무학대사는 정궁을 동향으로 짓도록 권했다. 본궁의 방향이 남향이면 지손(支孫)이 성할 지세이니, 적장손이 번성하여 왕통이 원만하도록 하려면 아무쪼록 정궁의 출입문을 동쪽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정도전이 반기를 들었다. 이미 지손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기에, 마침 잘 되었다 싶어 “무릇 지세로 볼 때 북한산을 주산으로 짊어지고, 인왕산을 우백호, 낙산(駱山)을 좌청룡, 앞의 남산을 안고 정궁을 세워야 왕조가 길이 이어질 것이다”라며, 정궁을 남향으로 할 것을 고집하였다. 태조도 이미 지손 방석에게 마음이 쏠려 무학대사의 「남향 왕궁 지손설」에 마음이 솔깃했다. 이리하여 경복궁은 정 남향으로 지어졌다.
무학대사 걱정대로 궁궐의 방향 탓이었는지, 조선 왕계는 적장자 보다 지손 위주로 이어졌다. 27인 조선 왕 가운데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단종·연산군·현종·숙종 다섯 임금 뿐인데, 아니나 다를까 모두가 불행하기 짝이 없을 만큼 끝이 흐렸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로, 부왕을 닮아 성군이 될 자질이 엿보였으나,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로 그만 세상을 떴고, 그의 장자 단종은 태어나는 날 어머니를 잃었고, 열두살 어린이로 왕이 되었으나 숙부 수양대군의 위압에 눌려, 재위 3년 2개월 만에 쫓겨나, 강원도 영월 산골에 폐출 당해 17세 나이로 목 졸려 죽고 말았다.
성종의 장자 연산군은 어려서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은 사실을 모른 채 자라, 열 아홉살 때 왕이 되었는데, 뒤에 어미의 사달을 알고 패륜에 빠져, 천하의 폭군으로 종사를 더렵히다가, 재위 11년 10개월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강화도에 유폐 되었다가 31세 나이로 허망하게 죽었는데, 그가 곧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의 손자로, 할머니를 머리로 받아 죽음으로 몰았고, 아버지가 총애하던 후궁 정·엄 두 귀인을 죽여 살점을 발라 젓을 담아 야산에 뿌려 초목의 거름이 되게 해버렸다. 또 백모 박씨를 겁탈하여 자결하게 만든 흉폭한 난군(亂君)으로,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효종의 장자 현종은 대군 시절 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살 때 심양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왕위에 올라 15년 3개월간 재위하였는데, 그는 즉위하자 마자 남인?서인간의 당파적 예송(禮訟)사건에 시달린 우유부단한 왕으로 지탄 받다가 34세로 숨지고 말았다.
현종의 장남 숙종은 14세에 등극, 45년 10개월간 왕위를 누리고 60세 일기로 숨진, 비교적 장수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도 극히 불행하였다. 첫 왕비 인견왕후가 책봉된지 4년 만에 20세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그녀 소생 두 공주도 잇따라 죽었다. 숙종이 두 번째 맞이한 왕비 인현왕후는 왕자를 낳지 못한 왕비로, 희빈 장씨의 농간에 말려 폐출되었다가 뒤에 복위되기는 했으나 소생 없이 35세로 죽고 말았다. 숙종의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는 16세때 왕비에 책봉되어 71세까지 살았으나 역시 소생이 없었다. 결국 숙종은 아들을 희빈 장씨에게서 얻었는데, 이가 곧 경종으로, 그는 14살 때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아 죽는 일을 당해야했고, 늘 병약한 몸으로 33세에 왕이 되어, 병석에서 4년 2개월을 버티다가 37세로 죽고 말았다.
이처럼 조선의 왕계에 적장자들은 하나같이 단명하고 불행하였다. 아마 저승의 무학대사는 자기의 짐작 그대로라며 매우 안타까워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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