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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16 ‘권력은 측근이 원수라!’

by 까망잉크 2018. 5. 24.

 

<조선왕조 뒷 이야기>16 ‘권력은 측근이 원수라!’

(주)하동신문 

                                             정연가 (전 하동문화원장)

최근 어느 중견 정치인은 직책을 벗어나는 참에 “권력은 측근이 원수라…” 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지난날 권력의 정상에 섰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측근들의 농간에 얹혀 치명적인 덤터기를 쓰고 좌절했던 일들을 두고했던 말이 아니던가 싶다.조선 정종2년(1400) 11월 13일, 바지저고리에 불과하였던 임금 정종이 결국 물러나고, 대권을 두고 골육상쟁을 벌였던 이방원이 드디어 옥좌에 오르니, 이가 곧 조선 3대왕 태종이다.태종 이방원은 신의왕후 한씨(韓氏) 소생으로 고려 공민왕16년(1367) 5월 16일 함흥에서 태어났다. 대학자 원천석(元天錫)에게 배우고, 유학자 길재(吉再)와 이웃에서 학문을 닦았다. 우왕8년(1382) 16세 때 진사가 되고, 이듬해 문과에 올라 벼슬이 곧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니,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격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총명하고 영특하였다. 고려 말기의 정치가 문란하여 민심이 흩어지는 꼴을 눈여겨 보고, 세상이 바로 잡혀야한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일찍이 관상을 즐겨보던 하륜(河崙)이 이방원의 인물됨을 보고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특한 기상이있다”며, 그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이성계의 둘째 부인 강씨(康氏)는 밤중에 이방원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저 얘가 어찌 내몸에서 나지 않았던가” 하고 탄식하였다. 평생을 무관으로 야전(野戰)에서 뼈가 굵은 아버지 이성계는, 가문에 유학(儒學)하는 자가 없다며 늘 아쉬워하다가, 아들 방원이 문신 반열에 들게 되자, 대궐에 들어가 우왕 앞에 엎드려 사례하며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쏟았다.그런 이방원이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새로 열어, 후계기반을 다지는 자리에 이르러 부자간에 눈을 부라렸스나,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권력 쟁취에 필연적으로 겪는 곡절에 불과하였다.대권을 거머쥔 태종 이방원은 18 년간 제왕의 자리에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 체제 확립을 위하여 신명을 다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공신과 친인척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는 『권력에는 측근이 암적 존재』임을 고사(古史)와 체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보다 튼튼한 통치 기반을 다음 후계자에게 넘겨 주기 위해서는, 먼저 걸림돌을 치워야했다. 실로 성군 세종이 이룬 업적은 태종이 무자비하게 설치며 다진 반석위에서 가능했다고도 할 수있다.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단행한 가장 큰 사건은, 곧 자기의 친 처남 넷을 몰 죽음으로 몰아간 이른바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였다. 민무구 형제들은 태종의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정 아우들로, <제1차 왕자의 난>을 비롯한 태종의 신변에 관련된 일마다 언제나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매형을 지켜낸 공신이자 최측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왕의 처남이라는 막강한 위치를 온전하게 주체하질 못해 패망해 버린 역사의 본보기였다.태종7년(1407년) 7월, 태조 이성계의 이복 아우 영의정 이화(李和)가 민무구·무질(無疾) 형제의 처벌을 요구하는 10가지 죄목을 적어 태종의 턱밑에 들이댔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이른바 「협유집권(挾幼執權)」을 도모했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5년전 태종이 종기(腫氣)를 심하게 앓아 누워있을 때, 그들이 몰래 왕의 병세를 엿보며 당시의 세자 양녕대군에게 왕권을 넘기도록하고, 어린 왕을 보좌한다는 핑게로 권력을 취하려했다는 것이었다. 사실여부을 떠나 그들의 인물됨이 충분히 의심 살만했다.태종도 평소 처남들의 행동 거지가 신경쓰였고, 마침 투기가 심한 원경왕후와 사이가 벌어졌으니, 처남들도 희망을 세자에게 걸었던 것으로 짐작, 마침내 처남들을 제거해야만 후환이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끝내 민무구는 옹진, 무질은 장단으로 유배 했다가 같이 멀리 제주도로 보냈다. 태종은 아들들 때문에 고민하던 장인 민제(閔霽)가 아직 살아있어, 처남들의 처형을 미루다가, 마침내 장인이 숨을 거두자 한달 뒤, 형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하여, 황천길에 아비를 뒤따르게해 버렸다. 그런 몇 년 뒤, 그들 나머지 형제 민무휼(閔無恤)·무회(無悔) 형제도 근신 하기는 커녕 남의 소송 사건에 함부로 끼어드는 등 말썽을 부렸고, 두 형이 죄 없이 당했다는 둥 바둥 거리자, 그들 마져 먼곳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그들도 태종16년(1416) 한해 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제왕의 처가 가문이 문을 닫을 지경이 돼버렸다. 뿐만 아니라 뒤에 후계자 세종의 처가 마져 작살내니, 측근을 원수처럼 여긴 태종의 심기는 그야말로 단호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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