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37 청백리의 청탁
(주)하동신문
80년대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공직풍토 쇄신을 위해 내 세운게 곧 『청탁풍조 근절』이었다.
그리하여 국가 기관장은 물론 일선 조장행정의 최말단 책임자까지 책상머리에 <청탁은 받지 않습니다>라고 새긴 나무 조각을 명패와 나란히 놓고 일했다.
그러나 그런 나무 조각이 무슨 영험이 있었으랴, 청탁은 오히려 더 심해 정권이 무너지자 잡혀들어가는 고위 공직자가 줄을 이어 법정은 북적거렸고, 감옥은 넘쳤다. 판검사들은 공직자들이 청탁의 대가로 챙긴 금품이 뇌물이 되는지를 묻고 따지느라 밤잠을 설쳤다. 그런 와중에 일반 범죄는 기승을 부려 서민들만 피곤했고, 일각에서는 체제를 흘겨보는 기운이 일었다.
옛 왕조시대 청탁은 요즘보다 한 차원 높게 다뤄졌다. 비리가 없으면 범죄로 치질 않는 그런 관대한 시대가 아니었다.
세종9년(1427) 정월 25일, 세종은 청백하기로 소문난 황희(黃喜)를 좌의정에 앉히고, 우의정에는 역시 청백한 인물 맹사성(孟思誠)을 앉혔다. 개국 초기 황희는 맹사성보다 나이는 네 살 아래였고 벼슬도 훨씬 낮았다.
맹사성은 고려말 우왕의 장인이며 권력자였던 최영(崔塋)장군의 손자 사위라, 전조에 벌써 관직 배경이 화려했고 조선 창업시기 두문동에 들어갔던 황희와는 달리 이성계(李成桂)의 개혁에 가담, 오늘날의 외교부처 국장급인 예조정랑이라는 권부의 핵심에 자리했고, 황희는 비교가 안되는 함경도 경원향교 훈도였으니 격차가 엄청났다.
하지만 특출한 인품의 황희는 태종의 천거로 신분이 급부상, 어느덧 맹사성을 앞질러 정승자리에 먼저 올랐던 것이다.
청렴하기가 황희에 못지 않았던 맹사성이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때, 태종의 사위 조대림(趙大臨)이 법도에 어긋나는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보고도하기 전에 잡아다 족친 사건이 있었다.
사위가 자기도 모르게 고문을 당했다는 전갈을 듣고 격노한 태종은, 조대림을 닥달한 책임자 맹사성과 그 아래 지평(持平:사헌부 고위간부) 박안신(朴安臣)을 죽이려 했다.
이때 황희가 나서서 태종의 노여움을 풀어 맹사성 등을 살려 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황희와 맹사성은 절친하기가 유별났다.
황희가 좌의정에 오른 그해 어느날, 황희의 사위 서달(徐達)이 어느 고을 아전을 때려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형조판서 서선(徐選)의 아우였던 서달은, 장인 황희와 형조판서인 형님의 권력을 믿어서였는지 함부로 건방을 떨다가 그만 기가 차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서달이 어머니와 함께 시골길을 가다가 그 지방 아전(衙前)을 만났다.
아전은 판서의 부인을 미쳐 못 알아보고 맨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지 않았다. 심기가 잡친 서달은 버릇 없다며 종을 시켜 그 아전을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팼다. 이때 사건 현장에 나타난 표운평이라는 동료 아전이 보다 못해 서달에게 항변했다. 그러나 서달은 더욱 미친개처럼 날뛰며 끼어든 표운평을 닥달했다. 오히려 더 심하게 당한 표운평은 이튿날 그만 숨을 멈춰 저승 군식구가 되고 말았다. 복장이 터질 듯 기막힌 표운평 아내는 감사(監司:도지사)를 찾아 호소했고, 놀란 감사는 상부 보고에 앞서 서달의 장인 황희에게 귀띔 부터했다.
속이 상한 황희는 딸을 생각하여 은밀히 우의정 맹사성에게 청탁, 사건을 축소 처리하기를 바랐다. 황희의 속사정을 해아린 맹사성은 피해자 표운평의 유족과 서달의 합의를 종용하고, 사건 담당 실무진에게 표운평을 매질한 서달의 종들만 처벌하는 선에서 사건을 덮도록 눈짓을 했다.
좌의정의 사위이며 법조의 수장 형조판서의 아우가 주범이던 살인 사건은 조용히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소리가 났다. 얼마쯤 뒤에 퍼진 소문으로 사건 전말이 세종의 귀에 들어갔다.
세종은 의금부(義禁府:대검찰청)로 하여금 재수사로 사건을 규명, 가해자를 엄벌하라 이르니, 사건을 잠재우려했던 황희와 맹사성, 수사책임자 감사와 실무진들이 줄줄이 엮여 감옥에 들어갔다. 다만 황희와 맹사성은 뒷날 풀려 출옥은 했지만 파직당해 귀양을 가야했다.
그러나 세종의 속내는 달랐다. 왕은 청렴하기 그지없는 두 정승의 행위는 우정에서 비롯된 순수한 마음일 뿐, 분명 추잡스런 비리는 없다는 짐작에서 끈질긴 대간들의 탄핵을 거부,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 말대로 함부로 죄 줄 수없다” 며, 열흘만에 다시 복직시키니, 황희와 맹사성은 각 좌우의정 자리를 되찾았다.
그들은 청렴한 인품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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