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65(주)하동신문
중종을 세워 세상을 바꾼 이른바 중종반정의 결정적 성공은, 전 경기도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의 군사력 동원 역할이 컸기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본관은 순천, 그의 아버지 박중선朴仲善은 영의정 심온沈溫의 외손자라 곧 세종대왕의 이질姨姪로, 세조때 익대翊戴·좌리 佐理 두 공신에 병조판서를 역임한 권부의 핵심이었다. 이런 가문배경으로 박원종은 성종때 등과 없이 선전관에 발탁됐었고 뒤에 무과에 올라, 왕의 총애로 26세 때 병조참지에 올랐다. 다시 연산군이 특명으로 그를 좌승지에 앉혔는데, 그는 왕실의 재정문제에 밝아, 폭정에 낭비를 일삼는 연산군에게 재정 긴축 문제를 거론했다. 그의 걱정이 용납되어 몇가지가 발라지긴 했으나, 연산군에게 찍혀 외직 평안도절도사로 좌천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성부우윤, 강원도관찰사 등 외방을 돌다가 경기도관찰사가 됐는데, 다시 연산군의 난정亂政과 부딪히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달라지기는 커녕 점점 정신이 나간 듯한 연산군은, 서울 외곽 양주, 파주, 고양 등 고을을 폐지, 땅을 비워 사냥터를 만들어 전국의 매, 개, 진귀한 새, 기이한 짐승들을 모조리 잡아 모아 길러 사냥감으로 삼았고, 어부의 배를 여러척 빼앗아 경회루 연못에 띄워 그 위에 요란하게 채색한 누각을 얹었으니, 겉으로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연산군은 혼자 취해 이런 율시를 지어 건방을 떨었다.
壯氣仙峯聳碧소
웅장한 산봉우리 공중에 솟구치니
神鰲靈鶴應時稠
큰 새우와 학이 때 맞추어 모였도다
群英咸宴忠臟合
영걸들 떼지어 즐기니 충심 합쳐지고
孤鬼幽囚譎腑焦
귀신은 잡히고 간사한 심장 불타도다
霧閣雲憁龍가逈
안개 구름창에 용머리 배 아득하고
虹梯歌管鳳樓遙
무지개 사다리 누각에 피리 소리 즐겁다
是誰留玩勞民力
누가 즐기려 백성의 힘을 괴롭힐 소냐
都爲朝鮮表壽饒
모두 조선을 위해 잘사는 것을 표함이네.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연산군의 처량한 마음이 담긴 시문이었다. 이에 박원종이, 고을을 헐어 사냥터를 만든 왕의 철없는 행위를 지적한 상소를 올리니, 연산군은
“이전에 나를 거스르는 자가 없더니 박원종이 감히 그러느냐?
하고, 박원종을 먼 변방 함경도관찰사로 보내 버렸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은 연산군의 백부였다. 그는 성종의 장인이던 절대 권력자 한명회의 힘에 밀려 아우인 성종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야했다. 그런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가 곧 박원종의 누이였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다. 월산대군이 성종19년 35세 나이로 그만 숨지니, 박씨 부인은 슬하도 없이 외롭게 살았다. 천하의 색광 연산군이 왕이 되자 곧 박씨 부인을 낚아 채 놀이개로 삼아 버렸다.「패륜의 극치」라는 세간의 비난 쯤이야, 임금이 하는 일인데「큰 어머님 겁탈」이 무슨「달 보고 짓는 개소리냐?」는 듯 들은 척을 않했다.
박씨 부인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호사를 누리는데, 항간에는 고약한 소문이 가득했고, 거리에는 그런 사실을 꼬집는 벽보가 나 붙어 오가는 사람들의 심기를 더럽혔다. 박원종은 체면이 구겨져 남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연산군을 원망하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들어 냈다가 그만 관직을 뺐기고 말았다.
수탉이 암탉 거느리듯 따지질 않고 덮치는 연산군의 패륜에, 부끄럼 없이 빠져든 박씨의 처신을 그냥 보고 넘길 박원종이 아니었다. 그의 호된 질책이 곧 누이 박씨에게 겨눠지니, 비로소 박씨는 깊히 깨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반정공신들이 주도한 <연산군일기>에는, 『박씨가 폐주 연산에게 능욕 당해 자결했다』라고 간단하게 기록 됐지만, 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불편하게 기록 되었다.
박원종은 새 임금 중종치하에서 승승 장구했다.
『공은 신장이 9척이며 풍채가 의젓하여 모습이 그 덕행과 맞았다. 마음이「겉과 속이 없어」까다롭지 않았고, 성품이 문아文雅하여 비록 현달함에 이르러서도 항상 책을 가지고 다녔다.』 역사의 기록이다.
박원종은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 책록과 함께 관직은 우의정으로 평원부원군에 봉해진 뒤 곧 좌의정이 되고, 중종2년(1507) 8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역한 이과李顆의 반란을 제압, 다시 정난공신 靖難功臣 1등에 책록 되는 등, 정국안정에 몰두하다가, 1509년 윤9월 영의정에 오르니 그때 나이 43세였다.
무신 출신이었으나 서화를 즐긴 풍운아 박원종은 영의정에 오른 이듬해 4월 아쉽게 숨지고 말았다. 역시 만복은 없다는게 하늘의 섭리가 아닌가 싶다.
정연가 (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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