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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81

by 까망잉크 2018. 10. 4.


<조선왕조 뒷 이야기> 81

세상에는 한 성씨(姓氏)가 519년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세습으로 나라를 이끈 경우는 전주 이씨의『조선』이 유일하다 여기는데, 그 바탕은 조선이 통치이념으로 삼은 『유학(儒學)』의 힘이 크다했다. 


근세에 조선이 망하자「유학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더니, 오늘날 대한민국의 힘은 곧「유학」에 있다고 학자들은 말하니 그 의미는 무엇일까
학문적으로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진 조선유학을 한층 꽃 피운 인물로는, 성리학(性理學)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큰 훈적을 남긴 김굉필(金宏弼)을 친다.


김굉필은 본관이 서흥(瑞興), 서흥은 황해도 지방 고을로 고려때 이곳 출신 상장군 김천록(金天祿)이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져 서흥을 관향으로 삼으니, 김굉필은 김천록의 8세손이 된다. 
널리 불려진「한훤당(寒喧堂)」은 그의 호였고 아버지 김유(金紐)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벼슬을 했으며 외가는 청주 한씨. 그의 증조부 김사곤(金士坤)이 관직을 돌면서 처가곳인 경상도 현풍에 정착하게 되어 영남의 사족(士族)이 됐고, 할아버지 김소형(金小亨)이 조선개국공신 조반(趙반)의 사위로 서울에서 살게 되니, 오늘날의 정릉이 김굉필의 태생지가 된다.


어린시절 김굉필은 매우 호방무애(豪放無碍)하여 거리에서 행인들을 매로 치는 일이 잦아 사람들이 그를 피하기도했는데, 철이 들면서 분발, 학문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현풍 인근의 아내 순천박씨 친정곳 합천 야로(冶爐), 아내의 외가 고을 성주 가천(伽川) 등지를 활동 무대로 삼아 선비들과 사귀며 학문을 닦았다. 
김종직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에 심취,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으며 “소학 속에서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달았네!”라며 이런 시를 지었다.



業文猶未識天機 글을 읽어도 하늘의 이치를 몰랐더니
小學書中悟昨非 소학 글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네
從此盡心供子職 이제 마음을 다해 자식된 도리 다할 지니
區區何用羨輕肥 구구하게 무엇하려 벼슬 부러워하랴


나이 30세에 이르러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한 김굉필은 육경(六經)을 두루 섭렵하고 성종11년(1480) 생원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이때 그는『척불(斥佛)과 유학 진흥에 관한 견해』를 담은 상소를 올려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성종25년(1494) 김굉필은 합천 야로에 머무르며 안음현감 정여창(鄭汝昌)과 자주 만나 학문을 토론하였다. 
이때「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그는 남부참봉을 받아 관직을 시작, 특진을 거듭한 끝에 사헌부감찰을 거쳐 3년만에 종6품 형조좌랑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무오사화를 맞아「김종직의 문도(門徒)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맹랑한 죄목을 쓴 채 김굉필은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당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짓이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때를 만난 듯 학문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이때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학문을 전해 우리나라 유학의 정맥을 잇도록 하니, 주변에 학구열에 젖은 선비들이 앞뒤에 꽉찼다. 그는 후학들을 이런 말로 훈계하며 깨우치기도했다.
“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것은 피를 머금었다가 뿜는 것과 같으니 먼저 그 입이 더러워 지느니라!”


그러나 비뚤어진 왕권은 잔인했다. 연산군10년(1504) 갑자사화를 벌인 폭군은 김굉필 의 옮겨진 귀양처 순천부(順川府)에 형리를 보내 그를 무참히 죽이니, 생애 51세. 그는 사경(死境)에 이르러 몸을 씻고 관대를 갖추어 추호도 변함 없는 낯빛으로 죽음을 맞았다. 
걸어 나가다가 신이 벗어지자 다시 바로 신고 수염을 만져 입에 물며, “이것까지 상하게 할 수없다”하고 태연히 칼을 받으니, 참으로 성인군자 다운 모습이었다. 


성리학에 통달했던 그의 문하에서 조광조, 이장곤(李長坤), 김안국(金安國) 등 조선 유학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들이 나왔다. 바뀐 세상 중종때 김굉필은 우의정에 추증되고, 선조는 문경공(文敬公)으로 시호를 내렸다. 광해군때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과 함께 동방5현의 첫째로 꼽혀 문묘에 배향되고, 경북 달성 경현서원, 하동 덕은사를 비롯한 전국의 12개 서원 주벽(主壁)으로 현창되어 추앙 받는다.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그의 묘소가있다. 그는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다. 언숙(彦塾)·언상(彦庠)·언서(彦序)·언학(彦學) 네 아들이 처음 귀양갔다가 모두 풀려 벼슬에 나갔고, 하박(河珀)·이장배(李長培)·정응상(鄭應祥)·강문숙(姜文叔)·정성린(鄭成璘) 등이 사위들인데 하나 같이 관직에서 이름을 냈다.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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