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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80 일두(一蠹), 정여창(鄭汝

by 까망잉크 2018. 10. 1.
<조선왕조 뒷 이야기> 80 일두(一蠹), 정여창(鄭汝
비록 시대적으로 동떨어진 캐캐묵은 얘기지만 사람들은 하동이 관향인「하동정씨」를, 여흥 민씨, 광산 김씨, 영일정씨와 함께 조선 4대반성(班姓)으로 쳤는데, 그 중심에는 하동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도학자 정여창(鄭汝昌)이 있다. 
대학자로 한글창제 주역이던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와 정여창은, 찬성사 정지연(鄭芝衍)의 후손인데, 정인지는 정지연의 장자 정익(鄭翊)의 증손이고, 정여창은 정익의 아우 정유(鄭宥)의 6세손이라, 정여창은 그리 멀잖은 정인지의 손자뻘이었다.


정여창은 세종32년(1450) 오늘날의 경상도 함양 개평촌에서 태어났다. 스스로 지은 호가 일두(一蠹), 「한마리의 좀」이란 뜻이었으니 극도의「자기 낮춤」이었다. 
어른들이 불러 주는 자는 백욱(伯勖), 「열심히 힘써 이룬 사람」을 뜻했다.「여창」은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압록강변 의주부(義州府)에서 통판(通判) 벼슬에 있을때,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첫눈에 보고, 특이한 아이라며 「능히 가문을 창성 시킬 인물이 될것이다」라는 해설까지 달아 지어준 이름이었다.    


정육을은 요즘의 대대장급 지휘관인 무관직 종3품 함경도병마우후에 올랐다가, 세조 때「이시애(李時愛) 난」을 만나 그만 순직하고 말았다. 정여창 나이 열 일곱 살 때였다. 
가례(家禮) 대로 아버지 상을 극진히 치른 정여창은, 홀 어머니 최씨를 지극히 섬기면서도 친구와 어울려 자주 술을 마셨다. 하루는 술에 취해 들에 쓸어져 밤을 새운 일이 있어 어머니가 매몰차게 나무랐다.
“아버지 없는 얘가 배우지 않으면 어찌 하느냐? 네가 이러면 나는 누굴 믿고 살겠느냐!”


이후 정여창은 김종직(金宗直) 문하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하였고, 제향 때 음복(飮福) 말고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이 극진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시달리니, 향을 피워 놓고 하늘에 빌기를, 「제몸을 바칠테니 불쌍한 어머니 목숨 만은  살려 달라」며 기둥에 머리를 찧어 흐르는 피가 옷을 적신 일도 있었다.


정여창은 벼슬에 나가기 전 3년간 오늘날의 하동 화개 덕은리 악양정자리에 터를 마련, 여유(汝裕)·여관(汝寬) 두 아우와 섬진강 풍치를 즐기며 학문에 몰두, 시·서·역경, 예기·춘추 등 오경(五經), 춘추시대의 노(魯)나라 기록 노론(魯論)에 정통했는가 하면, 그의 특출한 인품이 몸가짐에 그대로 들어 날 만큼 성리학에 통달했다.


성종11년 임금이 어명으로 행실이 반듯하고 경학에 밝은 선비를 추천하라 했더니, 유생들이 일제히 정여창을 거명했다. 
이리하여 임금 앞에서 강론(講論)을 하라는 천거가 있었으나 그는 완강히 사양했다.


성종14년(1483) 정여창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0년 왕의 특지로 소격서참봉에 기용되었다. 그는 한사코 마다했으나 왕은 허락하질 않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합격, 예문관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세자 연산군을 가르쳤다. 
싹이 노랗던 세자가 성심껏 가르치려 들던 정여창을 달갑게 볼리가 없었으니 결국 악연(惡緣)이 되고 말았다. 


성종이 세자를 부탁하는 자리를 마련, 정여창에게 술을 권하자 그는,
“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술 때문에 실수한 일로 어머니가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그런 뒤로 술을 마시지 않기로 맹세하였기 감히 어명을 거역하나이다. 용서하십시요!”
“참으로 유학자 다운 말이다!” 성종은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정여창의 마음에 감격했다.


성종25년(1494) 정여창은 지방관 자리를 원해 고향 안음현감이 되었다. 
현감은 종6품 직위로 가장 작은 지방행정 단위 수령이었다. 그는 작은 고을 하나를 맡아 뜻을 펴 보려했던 것이다. 
정여창은 그야말로 선정을 베풀고 학교를 열어 친히 백성들을 깨우치니 먼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기도했다. 


그러나 광풍의 시대 연산군 폭정을 맞아, 그는 「김종직 제자」였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고 먼 북방 종성에 유배 당해 버렸다. 세상과 인연이 끊긴 세월 7년만에 그만 눈을 감으니, 나이 55세, 그가 숨진 그해 9월 다시 갑자사화가 터지니, 사화의 원흉들은 그의 묘를 파헤쳐 해골에 칼질을 했다.


음풍농월을 멀리한 정여창은 시를 짓지 않았다. 다만 김일손과 하동에서 어울렸다가 남긴 시가 전하니 그가 남긴 유일한 시작(詩作)이다.


風蒲泛泛弄輕柔 
갯버들 바람따라 부드럽게 희롱하니
四月花開麥己秋  
4월 화개땅은 이미 보리가을이네.
看盡頭流千萬疊 
두류산 천만봉을 모두 구경하고
孤舟又河大江流 
외로운 배로 큰강 따라 흘러간다.


문묘에 배향되고 우의정에 추증된 문헌공 정여창의 묘소는 함양 수동에 있다. 아들 희직(希稷)이 선공직장(繕工直長)을 지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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