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82
세상에 비명횡사(非命橫死)로 목숨을 잃은 인물의 인간관계와 그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은 늘 악명 대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더구나 역사적 인물들의 피맺힌 죽음은, 두고 두고 후세들의 마음을 안타깝게한다.
무릇 현명한 권력자는 결코 사심(私心)으로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만고에 득좌(得罪)하는 짓임을 역사를 통해 배운다.
연산군이 저지른 실정(失政)의 가장 큰 아쉬움은 죄없는 인재들을 수없이 죽여 없애 버린 일이다. 「사화(史禍)」든「사화(士禍)」든 참신한 선비들을 싹쓸이로 처리해 버린 그 이면을 따지고 보면, 왕을 둘러 싼 출세지향주의자 유자광(柳子光)·임사홍(任士洪)·윤필상(尹弼商)·이극돈(李克敦) 등의 권력 놀음에 희생된 면면에 지나지 않았다.
김종직 문하에서 배워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던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과 가장 가까운 교우(敎友)로, 함께 목숨을 잃은 선비들 가운데 권오복(權五福)이 있었다.
그는 김일손보다 세살 아래 나이였으나, 성종17년(1486) 함께 문과에 오른 등과 동기였다. 문장이 맑고 건전했으며 필법이 굳세고 힘이 넘쳐 선비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다.
권오복의 본관은 예천(醴泉), 호가 수헌(睡軒), 아버지는 별좌 권선(權善)이었다.
권오복은 예문관을 거쳐 요직인 홍문관에 들어가 재능을 인정 받아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 전념했다가 홍문관 교리가 되었는데, 새 임금 연산군의 자질이 의심스러워 조정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연산군2년 고향의 늙으신 어머님을 봉양한다는 이유를 들어 귀향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김종직의 <조 의제문(弔 義帝文)>으로 인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걸려 유자광 등의 모함으로 잡혀 올라가 연산군4년(1498) 7월 같은 날 김일손·권경유(權景裕) 등과 나란히 극형에 처해져 「억지 죽음」을 당했다. 참으로 아까운 나이 32세.
권오복은 뛰어난 학문과 간결 청아한 문장력을 인정 받아 인문학을 특별히 장려한 성종치하에서 문화사업에 깊이 참여하였다.
성종20년(1489) 그 무렵 요동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의 학자 소규(召奎)를 찾아보고 <소학(小學)>의 의문점을 물어 번역하라는 왕명을 받아 의주까지 올라갔다가, 계획이 변동되어 되돌아 오기도했다.
성종24년(1493)에는 한자(漢字)와 이문(吏文)에 능했던 승문원참교 이창신(李昌臣) 등과 함께 법률조문에 밝은 신하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뽑혀, 법조문을 손질하기 위해 마련한 기관 사율원(司律院)에서 율문(律文)을 조정하고 율관(律官)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가축 말과 소의 질병을 다스리는 수의서(獸醫書) <안기집(安驥集)>·<수우경(水牛經)>을 번역하라는 왕명을 받기도했다.
성종25년(1494) 경상도 거제현에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이 심했는데, 방비를 맡은 수군만호 이극검(李克儉)이 왜구 세력을 두려워하여 도망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권오복은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사건의 진상을 엄정하게 조사 보고하였다.
사관은 권오복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했다.
『흉하고 포악하고 망극한 변을 당하여 죽음의 형틀 앞에서도 꿋꿋한 정신으로 조용히 죽음에 나갔다. 그 기절이 강하고 굳셈은 천품으로 타고 났다. 아아! 만사가 끝나고 무덤은 닫혀 말이 없다. 오직 남기고 간 문장이 하늘에 빛나매 그 광채가 별과 같고, 땅에 던지면 울리는 쇳소리가 무궁한 먼 생각을 자아 내게하니, 그 무도한 형벌인들 어떻게 백세에 끼친 향기를 없앨 수있으랴…!』
권오복이 화를 입자 그가 남긴 시문들과 유고들이 많이 불태워지거나 흩어졌는데, 그의 종 손자로 달성부사였던 권문해(權文海)가 흩어져 감춰졌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고, 부록으로 무오사화때 당한 인물들을 가려 명부를 정리하여 남겼다.
중종때 도승지에 추증 된 권오복은 예천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어 후세의 기림을 받고 있다.
권오복은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였다. 맏형 오행(五行)은 연산군때 문과에 올라 좌랑(佐郞)에 올랐고, 둘째형 오기(五紀)도 역시 김종직의 문하로, 연산군1년 문과에 올라 아우 오복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을 내 예문관의 정7품 봉교(奉敎)가 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는데, 아우 오복이 처형되자 함께 연루당해 전라도 해남으로 귀양갔다. 중종때 풀려 관직이 정3품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다.
권오복의 바로 밑 아우 오륜(五倫)은 진사에 머물렀고, 막내 아우 오상(五常)은 참봉이었는데, 권오복의 문집을 편찬 한권문해가곧 오상의 손자였다.
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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