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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83

by 까망잉크 2018. 10. 6.

 

 

<조선왕조 뒷 이야기> 83

(주)하동신문
인간의 존엄성은 다른 모든 것을 희생 시켜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귀한 가치다. 그런데 의지가 굳고 정의감이 돈독한 사람은 목숨을 걸고 의로움을 지키려한다. 까닭으로 권력에 밉보여 귀한 생명을 빼앗긴 일들이 허다하니 실로 안타깝다.
세조때 왕의 심중을 기막히게 헤아려 출세한 정승 윤필상(尹弼商)은 통치권자 입맛에 맞는 언행으로 벼슬이 쉽게 정상까지 올랐었다. 그러니 역사는 그를 이렇게 비하했다.『그는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임금뜻에만 영합하였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천하게 여겼다.』
윤필상이 세조의 총애를 받게 된 극적인 사건을 들어 본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어느 겨울 밤, 윤필상이 형방승지(청와대 법무비서관)로 숙직을 섰다.
그는 왕의 심중을 짐작, 각처에 수감 중인 죄수들 숫자를 자세히 적어 가슴에 품고, 혹 있을지도 모를 세조의 질문에 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조는 어지간히 백성을 생각하는냥 감옥에서 떨고 있는 죄수들이 얼마인가를 뭇는게 아닌가. 예측이 딱 들어 맞았던 윤필상은 속으로 쾌재(快哉)를 부르고 수첩을 꺼내 정확하게 답변했다. 윤필상을 보는 세조의 눈빛이 달라졌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김종직문하에 재용(才勇) 넘치는 선비 이목(李穆)이 있었다.
그의 본관은 전주, 왕실 후예는 아닌 것 같았다. 경기도 김포에서 참의 이윤생(李閏生)의 아들로 태어난 이목은, 성종15년(1484) 14세 때 김종직에게 배우기 시작했고, 19세때 초시에 합격 생원·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 무렵 성종이 병을 얻어 시달리자 성종의 어머니인 대비가 무당을 불러 빈궁 벽송정에 단을 만들고 굿을 하려했다. 이때 이목이  유생들을 끌고 가 무당들을 매질로 닦달, 내쫓아 버렸다. 이목의 나이 열아홉살 때였으니, 참으로 보통 기개가 아니었다.
왕의 어미가 아들의 병을 고쳐 보려 마련한 치성(致誠) 자리를 부셔버렸으니, 대비의 격분은 하늘을 찌를 만했다.
대비는 왕 병중에 시끄럽게 구는 것을 피해 참고 기다렸다가, 왕의 병세가 호전 되자 아들 성종에게 엄중 처단 할 것을 원하며 고했다.
그러나 성종은 너그러웠다. 대비의 극성스런 성정을 간파한 왕은, 거짓 화낸 표정으로 유생들을 모두 잡아 들이라며 호통쳤다. 유생들을 모두 피하게하고 이목이 혼자 버텼다. 성종이 이목을 가만히 불러 오히려 이렇게 치하하였다.
“네가 능히 선비 기질을 바로하였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그해 5월 가뭄이 심해 민심이 흉흉했다. 이때 소년 선비 이목은 영의정 윤필상을 걸어 이런 상소를 올려 조정을 뒤집었다.『윤필상이 간악하여 하늘이 벌주는 것이니 그를 처 죽여야 비가 내릴 것이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개 대학생이「국무총리를 삶아 죽여야한다」고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올린 격과 다름 없었다. 뒤에 거리에서 이목을 만난 윤필상이
“자네가 꼭 늙은 내 고기를 먹어야만 하겠는가?”하고 능청스럽게 말을 거니, 실로 가증스러운 비아냥이었다. 이때 영의정 윤필상은 65세 나이의 국정 원로, 소년 이목은 들은체 만체 지나쳐버렸는데, 윤필상이 대비에게 아부하느라 불교 숭상하기를 왕에게 자꾸만 권하니, 이목은 윤필상의 간사함을 더욱 강하게 논박, 주살(誅殺) 할 것을 청했다.
속설에 『모난 돌이 정(釘) 맞는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이목은 너무 의(義)를 강조한「모난 돌」이 아니었나 싶다. 끝까지 윤필상의 간사함을 꾸짖다가 결국 권부의 미움을 홀로 받아 공주로 귀양을 가야했다. 성종 22년(1491) 왕은 이목을 달리 보아 귀양에서 풀어 중국 연경에 유학까지 보내 공부에 전념하게 했다. 그러나 곧 성종이 세상을 뜨고 연산군이 즉위했다.
연산군 등극 그해(1495) 이목은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이 되고, 영안도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로 더욱 학문을 익혔는데, 연산군4년에 덮친 무오사화로 그만 김일손과 함께 처형 당하니 나이 28세, 참으로 죽기 아까웠다.
사람들은 윤필상이 이목을 어거지로 김일손일당에 얽어 젊은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고 개탄했다.
이목은 참혹한 죽음을 앞두고도 기색이 변함 없었고, 스스로 절명가(絶命歌)를 지었다. 뒤에 터진 갑자사화로 형이 추가 돼 부관참시 당했는데, 연산군은 온갖 호사를 누린 윤필상도 폐비 윤씨의 죽음을 막지 않았다는 죄로 유배 보내 사사(賜死)하려했더니, 미리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부끄러운 삶 78세였다.
이조판서와 양관대제학에 추증되고 공주 충현서원에 제향된 정간공(貞簡公) 이목에게는, 죽을 때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 세장(世璋)이 있었는데, 너무 어려 죽음을 면했다가 훗날 강원도관찰사에 올랐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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