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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79

by 까망잉크 2018. 9. 25.

<조선왕조 뒷 이야기> 79



滄波萬頃櫓聲柔 
만경 창파에 노젓는 소리 부드럽고
滿袖淸風却似秋 
옷소매를 스치는 바람 가을 같도다
回首更看眞面好 
머리 돌려 아름다운 모습  다시 보니
閒雲無跡過頭流 
뜬 구름만 흔적 없이 두류산을 지나네



성종20년(1489) 4월, 25세 청년 김일손(金馹孫)이 문우(文友) 정여창(鄭如昌)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섬진강을 따라 내려와 악양에서 뱃놀이를 하며, 「백욱(伯勖-정여창의 호)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고 돌아 오는 길에 악양에서 뱃놀이하다」라는 시제로 읊은 시다. 
하동의 풍정이 제대로 담겨 그의 문재(文才)를 짐작케한다.


김일손의 본관은 김해, 아버지는 사헌부집의 김맹(金孟), 경상도 청도 출신, 성종17년(1486) 23세때 진사시에 장원하고 그해 11월 중형 기손(驥孫)과 함께 문과에 응시, 형이 장원하고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첫 벼슬은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앞에 붙은「권지」는 요즘의 초임 공무원에게 주는「조건부」라는 뜻이었다. 
곧이어 정9품 정자로 승진, 춘추관기사관을 겸하니, 운명의 사관(史官)이 된 것이다. 이어 정6품 교수(敎授)로 진주향교에 내려 왔다가 사직,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때 그의 운명을 틀어 버린 스승 김종직(金宗直)문하에 들어가 정여창·강혼(姜渾) 등과 어울리게 됐다. 
그는 다시 발탁 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전도양양한 현직(顯職) 이조정랑에 올랐다. 
그는 세조가 파버린 문종비 현덕왕후 복위를 주장하고, 세조 그늘에서 출세한 훈구파 유자광·이극돈(李克敦) 등의 불의와 권력남용을 대 놓고 공격하는 한편, 사림(士林)의 등용을 확대, 혐오스런 자들이 판을 치는 정계에 새 바람을 불어 넣으려는 의욕에 불탔다. 


그러나「시대」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성종이 승하하고 얼빠진 연산이 등극하자 때를 만난 훈구들은 그의 『조 의제문 사초화(史草化)』와 『문종비복위 주장』을 트집 잡아 물어 뜯으니, 연산도 덩달아 그를 능지처참해 버렸다. 
이른바 무오사화, 나이 35세, 슬하도 없었다. 암울한 정국을 피로 덧칠한 수치스런 흉거였다. 


김일손은 절개가 굳어 옳지 못한 일에 대하여는,「꺾일지언정 굽힐 수는 없다」는 기질이 있었다. 그가 두 살 아래인 동료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영남어사로 나가는 길에 용인(龍仁)에 이르러 객관 숙소에서 밤을 지새다가 정치판 이야기가 나왔다. 
이때 김일손이 과격한 말로 시국을 개탄하자 온건한 성격의 정광필이 “그렇게 말 할 것이 아니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김일손은 
“사훈(士勛-정광필의 자)도 역시 저속하고 기절(氣節)없는 벼슬아치 노릇이나 하려나!” 하고 핀잔을 준 일도 있었다.


김일손이 허무하게 실명(失命)하자 남효온(南孝溫)은 이렇게 썼다.
『공(公-김일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조정의 그릇이었다. 문장의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 인물을 가리고 국사를 논함이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 놓고 죽였는가!』



또 남곤(南袞-중종때 영의정)은 그의 비통한 심경을 담아 이런 만시(輓詩)를 썼다. 원문과 내용 일부를 생략한다.
『귀신은 아득하고 어두운데/천도(天道)는 진실로 알기 어렵구나/ 귀신은 좋아하고 미워함이 인간과 달라/화와 복을 거꾸로 베푸나니/ 길고 긴 이 우주에 오래 사나 짧게 사나/하루살이와 같지 않은가/ 죽음 뒤의 즐거움이 속세의 임금보다 나을지 어찌 알랴/웃음으로 달관(達觀)하니 뜬 구름처럼 아득하다/다만 세상에 이름난 사람은/한번 나기 더뎌 수백년만에 한번 보게 되었는데/그를 보고도 성취 시키질 못했으니/태평치세를 어느때 다시 보랴!/ (중략) 혼정(昏政)을 통곡하고 용감하게 맞섰도다/훈구의 무리들이 이를 갈며 엿보는 줄 어찌 알았으랴!/ (중략) 붓을 잡아 들은 대로 씀은 사가(史家)의 본분이다/ 들은 바가 다르고 틀림이 있다해도/그것은 한 사람의 사견(私見)일 뿐이다/반드시 사초가 잘못 됐다면/실록청이 바로 잡으면 될 것을/뱃속에 품은 더러운 칼로/터럭 속의 흠터를 억지로 찾았네/ (중략) 관직에서 직무를 다하지 못한 죄는/매를 치면 될 일이요/ 현능한 인재는 특별히 용서하고/감형하는 옛 법도 있도다.(이하 줄임)


김일손은 세 형제의 막내라 위로 준손(駿孫)·기손(驥孫) 두 형이 있어, 형제들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내고 문과에 올랐다. 그는 맏형이 먼저 급제하도록 뒷바라지하고, 다음 중형과 나란히 우수한 성적으로 등과하니, 임금 성종이 특별히 연회를 열어 축하해 주도록 명했다. 김일손의 맏형 준손은 아우의 탈에 연루되어 호남으로 귀양 갔다가 풀려 뒤에 직제학에 올랐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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