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84
갑자사화때 극도의 참화를 입은 인물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왕족 이총(李摠)이다. 아버지와 여섯 형제가 몰 죽음을 당했으니, 한 왕실 종친이 이처럼 떼로 몰살 당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총은 태종의 서3남 온녕군(溫寧君) 정(程)의 손자였다. 아버지 는 우산군(牛山君) 종(踵)이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종친으로 봉군(封君) 받아 종친부 고위직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총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의 사위로, 어려서 종친부 종3품 부정(副正)이 되고, 이어 정(正)으로 승차, 호칭을 무풍정(茂豊正)이라했는데,「무풍」은 왕족 호칭이었다. 그는 학문을 즐겨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문하에 드나 들며 참신한 선비들과 교류가 깊었으니, 그게 그의 운명을 갈라 버린 탈이 되고 말았다.
이총은 시문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다뤘다. 안평대군과 쌍벽을 이룰 만한 종친 학자요 예술가였다.
그는 양화도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그물을 마련, 날마다 배를 저어 그물질로 고기를 잡고, 친구들과 시 짓기를 즐겼다.
일찍이 장인 남효온이 혼탁한 정치판이 싫어 세상을 흘겨보며 방랑길을 나설 때 문우(文友)들과 어울려 환송하는 술자리를 폈는데, 술기운이 돋은 이총이 남효온의 부채에 이런 시를 썼다.
相知八年內 서로 안지 팔년인데
會少別離多 만남은 적고 이별은 잦네.
臨分千里手 천리길 떠나는 손을 잡고
掩泣聞淸歌 눈물 가리며 맑은 노래 듣네.
이총의 시를 읽은 좌중은 모두 눈물을 훔쳤다.
그는 스스로를 「구로주인(鷗鷺主人-갈매기와 백로떼 소유자)이라 부르며 세태에 구속 받지 않고 살고자했다.
서(書)와 사(史)를 즐겨 읽고 시(詩)와 문(文)을 탐구했으며 음률(音律)에 취할 줄도 알았다. 사람들이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궁중의 모란꽃이 푸른 하늘 아래 만발하게 핀 것 같다!”며 찬탄했다.
그는 장인 남효온·홍유손(洪裕孫)·이정은(李貞恩) 등과 함께 청담파의 중심인물로, 양화진 정자에 놀며 늘 강에 고기잡이 배를 띄워 친구들과 유유자적하다가, 가끔 낯선 선비가 찾는 기미가 엿보이면 손수 배를 저어 멀리 몸을 숨기곤했다.
연산군4년(1498) 무오사화가 덮치니, 이총은 『종친이 사류(士類)들과 어울려 정치를 비방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쓰고 함경도 온성에 귀양을 가고 말았다. 뒤에 부근의 단천역(端川驛)에 간신들을 비난하는 벽서가 붙어, 정치문제로 번지니 이총은 새로 허물을 쓴채 다시 곤장 일백대를 맞고 거제도로 이배(移配)됐다.
이때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도 무사하질 못해 함께 먼 섬으로 귀양을 가야했고, 모두 종적(宗籍)에서 이름이 지워져 서인으로 몰락, 가세가 거덜 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연산군10년 갑자사화가 터져, 연산군이 생모폐출에 관련했거나, 왕족으로 수수방관한 신하들과 종친들을 무더기로 죽이는데, 이총도 걸려들어 죽음을 피하지 못했고, 2년 뒤에는 그의 아버지 우산군 이종, 형 정(正) 이정(李挺), 부정(副正) 이간(李揀)·이건(李건)·이변(李변), 아우 부정 이간(李杆)이 모두 귀양지에서 붙들려 올라와 6부자(父子)가 한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니, 가문이 돌풍에 흔적없이 흩어져 버린 꼴이되고 말았다.
이때 장인 남효온은 이미 고인이 됐는데, 무덤이 파 헤쳐져 해골이 난도질 당했다.
조선왕조는 왕족들의 돈목과 왕실 안정을 다지는 기구로 종친부를 두었다.
종친은 왕의 부계(父系) 가운데, 왕의 적출 4대손, 서출 3대손까지를 종친으로 대우하고 군호(君號)를 주었는데, 종친부는 이들 왕족들의 출입처로, 관계(官階)를 정1품부터 종7품까지 두고, 정1품에서 종2품까지의 최상위 직명을 군(君)으로하여 왕자들이 앉았고, 정3품 도정(都正)·정(正), 종3품 부정(副正)자리는 왕자 아들이나 손자에게 주어졌다.
이리하여 이총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모두「군」·「정」·「부정」자리에서 왕족으로 한 세상을 누리다가 이총이라는 한「휴머니티」가 탄생, 하루 아침에 가세가 곤두박질 친 셈이 되고 말았다.
세상이 바뀐 훗날 이들 7부자는 칠공자(七公子)로 불뤄져 모두 복작 되고, 이총에게는「무풍군」승품과 함께 관직으로 명의대부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추증하였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두 시호를 받아 이총은 소민공(昭愍公)이었고, 7부자에게 각각 정려(旌閭)까지 세워지니 나라의 보살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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