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85(주)하동신문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가늠이 안되는 묘한 인연에서 판가름 되기도한다. 장래가 촉망되던 출중한 인물이 전혀 뜻밖의 일로 꺾여 버리는 비극의 주인공들 가운데 심순문(沈順門)이라는 강결한 인물이 있었다.
심순문은 성품이 강직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아 폭군 연산의 폐정을 자주 논박하다가 엉뚱한데서 트집 잡혀 죽임을 당한 그야말로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세종대왕의 처가로 이름이 들어난 명문 청송심씨 가문에서 영의정을 지낸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증손이며, 역시 영의정에 올라 부자 영의정으로 가문을 빛낸 심회(沈澮)의 손자였으니 이를테면 세종임금의 처가 종손이었다.
심순문은 세조11년(1465) 내자판관 심원(沈湲)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일찍이 세상을 떠 홀어머니와 함께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어린 시절 심순문은 학업에 뜻을 두지 않고 철없이 방황하다가 어머니의 엄한 훈계와 정성어린 교육에 깨달은 바있어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밤낮을 잊고 열심히 학문을 닦아, 성종17년(1486)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1년(1495) 31세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는 올곧은 품행으로 아직 타락하기 전인 연산군 초기에 관직이 순탄하여 곧 박사로 승진,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부수찬·정언·부교리·지평을 거쳐 1503년 정4품 사헌부장령에 오르니, 급제 8년만에 국가 기강을 다루는 중추적 위치에 이르른 셈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날 점차 정신을 잃어가는 연산군 의복의 길고 짧음을 문제 삼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샀고, 뒤에 <임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는 불경죄로 1504년 갑자사화 때 걸려 들어 경상도 개령(開寧)에 귀양 갔다가 참수 당해 비명에 목숨을 잃으니 나이 40세였다.
심순문의 죽음은 많은 아쉬움과 함께 색다른 여운을 남겼다. 심순문은 같이 벼슬길에 오른 친구 강혼(姜渾)과 함께 어울리며 두 사람이 각기 미모가 빼어난 기생첩을 두고 있었다. 이를 눈여겨 본 선배 정붕(鄭鵬)이 은근히 타일렀다.
“빨리 버리어 뒤에 뉘우치는 일이 없게하라!”
이 말을 들은 강혼은 곧 기생첩을 버렸으나 심순문은 웃어 넘기고 말았다. 뒤에 두 기생이 채홍사에게 걸려 궁중에 뽑혀 들어가 연산군의 애첩이 되니, 연산군이 질투심이 북바쳐 심순문을 죽여 버렸다는 설이 떠돌았다.
물론 강혼은 무사했다. 그러나 강혼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라 무오사화때 파란을 겪였으나 뒤에 풀려 연산군에게 시와 문장으로 아부, 관직이 왕의 비서실장인 도승지에 오르니 심순문과는 다른 성격으로 몸을 보전한 샘이다.
갑자사화때 연산군이 심순문을 죽이려 작정하고 중신들에게 뜻을 물었다. 중신들이 감히 말을 못하고 주저 할 때 대사간 성세순(成世純)이,
“직분이 간관(諫官)인데 어찌 말없이 잠잠히 있으리오!”
하며 심순문을 두둔했고, 헌납 김극성(金克成)은
“벼슬이 간관이라 사람이 죄없이 죽는 것을 보고 몸을 아껴 말하지 않는다 해도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되니 어찌하랴!”하고 안타까워하니, 정언 이세응(李世應)이
“그 말이 옳다!” 하고 두 사람의 뜻에 동조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만약 임금의 뜻을 거역하면 모두 심순문과 함께 죽을 것이니 결국 이익이 없는 짓이다!” 며, 세 사람을 우려했다. 그러나 연산군도 체면과 염치가 있었던지 심순문은 기어이 죽였으나 세 사람은 살려주었다.
연산군은 심순문을 죽인 이유로 심순문의 할아버지 심회를 끌어 댔다. 심회를 폐비 윤씨 죽음에 얽어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의 손자를 연좌시켜 죽였다고 공식화 했으나, 속을 뒤집어 보면 왕의 총비를 먼저 건드렸던 신하를 살려 둘 수 없는 패군(悖君)의 질투심이 두텁게 깔려 있었으니 정붕의 예견이 참으로 적중했던 셈이다.
심순문에게는 재치가 넘치는 아우 심순경(沈順徑)이 있었다. 그는 형과는 달리 할아버지 죄에 연루되지 않고 살아 남아 훈련원첨정 벼슬에 있었는데, 어느날 연산군이 잔치자리에서 말을 빨리 끌고 오라는 왕의 재촉을 받고, 잔치상 펼쳐진 비단 자리를 무릎을 굻고 신속하게 좌우로 잡아 제치며 잔치 음식이 훼손되지 않게 말을 대령하니, 연산군이 기특하게 여겨 그를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켰다. 같은 심회의 손자였으나 대접이 이처럼 달랐던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심순문의 죄는 풀리고 그의 아들 심연원(沈連源)은 명종때 영의정에 올랐다.
정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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