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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95

by 까망잉크 2018. 10. 29.


<조선왕조 뒷 이야기> 95

 
“결혼이 어디 너희 둘만의 일인 줄 아느냐? 「사랑」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그게 어디 밥을 먹여 주나? 혼사(婚事)란 엄연한 집안과 집안끼리의 결합이다! ”
행세깨나 하는 잘난 부모들이, 자식이 매달리는 연인이 욕심에 차지 않는다며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된다」고 악을 쓰는 엄포다. 자식을 갖고 팔자를 한번 고쳐 보려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요즘의 세태를 비꼰, TV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그게 틀린 말이라고 나무랄 성인군자가 어디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결혼』이란, 별 볼일 없는 밑바닥 인생들을 다독거리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말이라 여기기는, 옛날 봉건왕조시대가 훨씬 더 심했다.  
강한 자만 살아 남는다는 경쟁 사회에서,「혼맥(婚脈)」을 강력한 신분 상승의 바탕으로 삼은 역사적 사실들은 얼마든지 많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길 닿는 곳마다 「여자」와 인연을 심어, 뒤에 나라를 개창하는데 큰 덕을 봤다. 우리 하동 금오산 기슭에도 왕건에게 마실 물을 떠 준 처녀가 뒤에 왕비가 됐다는「왕비샘 전설」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호족 강윤성(康允成)의 딸을 두 번째 처로 삼아, 처가를 개국의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성공했다.
대군 시절의 세조가 어느날 느닷 없이 당대의 인물 정인지(鄭麟趾)의 집을 찾았다. 
그때 정인지는 실권이 없는 판중추원사. 그는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뒤에 문과 중시(重試)에 다시 장원으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세종의 한글 창제 핵심 역할은 사실상 정인지 몫이었고,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일찍이 예문관대제학, 형조판서, 우참찬, 예조판서, 좌참찬 등 요직을 두루 섭렵했는데, 수양대군과 관계가 수상쩍다는 권력자 김종서(金宗瑞) 등의 넘겨 짚은 짐작 때문에, 그만 별 볼일 없는 한직으로 밀려 나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야심 찬 수양대군이 욕심을 내 접근한 인물이 바로 정인지였고, 그가 명나라 사신으로 나갈 때 함께 갈 부사(副使)로 정인지를 꼽아 동행 함으로써, 같은 편당으로 비쳐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느날 예고없이 정인지의 집을 찾은 수양은 마당에 놀고 있는 정인지의 둘째 아들 정현조(鄭顯祖)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들이 닥친 수양대군을 맞은 정인지는 크게 당황하였다. 
천하에 둘이 없는 귀한 대군의 불시 행차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정인지는, 안절 부절 몸 둘 바를 모르는데, 수양은 정인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고 목청은 낮쳤으나 힘주어 말했다.
“공의 아들 현조를 사위 삼아야 되겠오!”
갑작스런 강요성(强要性) 청혼에 놀란 정인지는 곧 수양의「숨은 뜻」을 알아 차리고 엉겹결에「허혼(許婚)」하고 말았다. 
평소에 수양이 품은「속내」를 진즉부터 눈치챘던 정인지는, 「김종서 등의 홀대」에 한이 맺혀 주저 할 마음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곧 정현조는 두 인물이 마주 앉은 사랑방에 불려 들어가 수양에게 큰 절을 올렸다.
단종이 등극했던 해인 1453년 10월에 수양 일파가 일으킨 쿠데타,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인지는 좌장 역할을 했고, 정난 이태만인 윤6월 단종을 밀쳐 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한달 뒤인 7월에 약속 대로 하나 뿐인 딸 의숙공주를 정현조에게 시집 보냈다. 
세조는 사돈 정인지를 곧 국정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 앉히니, 사돈끼리 완전히 국권을 틀어쥔 셈이 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세조는 큰 아들 의경세자를 한확(韓確)의 딸에게 장가 보냈는데, 그때 누이가 명나라 선종(宣宗)황제의 후궁이던 한확은, 늘상 명나라 눈치를 살펴야했던 조선에서 그 위치가 대단했다.
세조는 또 둘째 아들 예종을 희대의 책사 한명회(韓明澮)의 딸과 결혼시켰다. 
정통성이 결여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이처럼 얽힌 혼맥으로 천하에 두려울 것 없는 강력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세상 일은 쉽지 않다. 
세조3년(1458)9월, 한확의 사위 의경세자가 감기를 오래 앓더니 그만 죽었다. 나이 겨우 20세. 세자빈 한확의 딸은 뒤에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유명한 인수대비가 되어 한세상 누리더니, 손자 연산군이 머리로 가슴팍을 들이 받는 통에 몸져 누웠다가 그만 눈을 감았다. 예상하지 못한 큰 비극이었다.
세조의 둘째 며느리 한명회의 딸은 세자빈 시절에 아들 인성대군을 낳다가 산욕(産褥)으로 죽었는데, 나이 17세였고 아이도 곧 죽고 말았다. 남편 예종도 재위 14개월만에 세상을 등지니 역시 나이 20세. 이처럼 세조는 요절로 두 아들을 잃은 셈이었다. 
정인지의 며느리 의숙공주는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젊은 나이로 죽었는데, 남편 정현조는 하성부원군에 책봉되어 크게 호사를 누렸으나 「물욕이 과했다」고 역사는 기록했다. 
세상에서의 만사형통(萬事亨通)은 오로지  하늘의 뜻이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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