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97
『백성은 돌보질 않고 나라가 잘돠고 못되는 것은 「내 알바 아니다」는 듯 왼고개 치며, 오로지 간사하게 권력에 영합하여 구차히 탐욕스럽고, 감투를 지탱하기 위하여 널리 애쓸 뿐인 이런 관리를 일컬어 국적이라한다.』옛날 순자(荀子)가 한 말이다.
역사에 추한 이름을 남긴 국적은 많다. 조선조 최악의 국적 가운데는 문정왕후의 친정 붙이 윤원형(尹元衡)을 뺄 수없다.
윤원형은 중종28년 문과에 붙어 사관(史官) 벼슬을 했는데, 누이 문정왕후를 업고 까불다가, 세자(인종)의 외숙 윤임(尹任)과 중종의 사돈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파직된 일도 있으나, 문정왕후 그늘로 승승장구했다.
중종39년(1544) 11월, 윤원형이 요즘의 청와대수석비서관격인 좌승지가 됐을 때 중종이 죽고, 허약한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종이었다.
심성이 비단결 같았던 인종은 계모 문정왕후 비위를 맞추느라 윤원형을 챙겨 특별히 공조참판으로 승진 시켰는데, 윤가를 눈에 든 모래알 처럼 여긴 윤임 등이, 호랑이 뒤의 여우처럼 뻐기는 윤원형을 찍어 내 쫓아 버렸다. 그러나 하늘은 야속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남짓만에 숫한 의문을 남긴 채 그만 숨을 거두니, 인종이 하루라도 어서 저승으로 떠나기를 빌던 문정왕후는, 자기 뱃속에서 나온 경원대군을 후다닥 임금 자리에 앉혀 버렸다.
이가 곧 겨우 열두살 된 명종, 왕이 뭣인지도 모르는 어린애를 옥좌에 앉힌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선포, 엉거주춤 앉은 임금 뒤에 발을 늘어뜨리고 똬리를 틀고 앉아 발 틈새로 대신들을 노려보며 정사를 주무르는데, 가장 먼저 손 쓴게 윤원형을 예조참의로 기용한 일이었다.
정계에 복귀한 윤원형은 나라가 어떻게 되던 알바 아니고, 가장 화급한게 정적 윤임 일파를 죽이는 일이었다.
그의 꾀는 참으로 용했다.
그는 윤임이 인종비 박씨에게 보내는 것처럼 한글 편지를 조작, 대궐 뜰에 떨어뜨려 문정왕후 손에 들어가게 했는데, 내용은『인종이 승하하면 계림군(桂林君)을 세우자』였다.
계림군은 월산대군의 손자로 성종의 서장자 계성군의 양자였다.
거기다가 윤임과 한편인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이 중종의 서6남 봉성군(鳳城君)을 추대하려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그 소문을 애첩 정난정(鄭蘭貞)의 주둥이를 통해 문정왕후 귀에 넣어 주었다.
문정왕후는 걸려든 왕자들부터 닦달, 윤임 등을 죽일 건덕지를 만들었다.
봉성군이 고문에 시달려 혐의를 시인하니 목졸라 죽였고, 계림군은 도망쳤다가 붙잡혀 끌려 왔다. 왕후는 한사코 죄를 부인하는 계림군을 빨가 벗겨 엎어 놓고 벌겋게 달군 쇠뭉치로 짓이기니, 살 타는 누린내가 대궐을 덮었다.
초죽음이 된 계림군은 자백을 거부하며 헐떡거리다가 결국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내친 김에 한글편지 수신자로 입질에 오른 인종비 박씨도 해치우려했으나, 시신이 아직 대궐 안에 안치 되어있는 인종의 비(妃)를 차마 형틀에 매달 수는 없어, 왕비의 시녀 여섯을 잡아 「한글편지를 모르느냐?」고 닦달했다.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모른다」며 함께 죽어 가니, 박씨는 대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윤원형은 같은 파평윤씨로 복내(服內) 숙향뻘인 좌찬성 윤임을 역적으로 몰아 남해로 귀양 떠나게 하더니 충주에서 약을 먹여 죽였다. 윤임과 정치적 동반자였던 판서 유인숙은 봉성군을 세우려했다는 얼토 당토 않은 누명을 씌워 네 아들과 함께 황천길로 보냈다.
문정왕후 세 남매가 정적들을 골라 죽이는데 여념이 없던 명종2년(1547) 9월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이런 벽보가 붙었다.
『여자 임금이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기) 등이 권력을 농락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원흉 윤원형이 들어 얹히지 않음이 수상쩍다.
라이벌 이기까지 몰아 낼 기막힌 자작극이 아닐까.
윤원형은 윤임의 잔재를 싹쓸이 할 빌미를 잡은 것이었다. 가장 먼저 윤임의 세 아들 흥인(興仁)·흥의(興義)·흥례(興禮)를 「네놈들 짓이렸다!」며 곤장으로 닦달, 세 형제를 두들겨 패 죽이고 말았다.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은 본실을 독살하고 안방을 차지했다.
빼앗고 거둬들인 뇌물이 넘쳐 장안에 대궐 같은 집이 열여섯채나 되었다.
그는 욕심나는 전답은 무조건 빼앗으니, 땅을 뺏긴 백성이 항의하다가 맞아 죽었으나, 가족이 시체를 업고 나오면서도 입도 벙긋 못했다.
형 윤원로를 걸림돌이 된다며 죽였고,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만수무강을 빈다며 철마다 흰쌀 여러 섬으로 밥을 지어 한강에 쏟아 부어 고기밥이 되게하니, 굶는 백성들은 「사람은 굶기고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것은 무슨 경우냐?」며 이를 갈았다. 윤원형 일가는 별난 국적들이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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