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99
명종20년(1565) 4월 초 엿샛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드디어 죽었다. 나이 예순 다섯. 열 일곱에 왕비가 되고, 마흔 넷에 남편 중종이 세상을 뜨니 그녀는 11년간 효성스런 임금 어미로 권력을 휘둘러, 보신탕집 안주인 복날 개 잡듯 사람을 해치운 여흉(女兇)이었다.
당대의 권신이며 사돈인 김안로(金安老) 일당을 죽인 것은, 자신의 정적이었기에 이해가 되는데, 이 사건이 그의 무자비한 잔혹성(殘酷性)을 싹틔운 씨앗이 되었다.
문정왕후는 세조의 국구 윤번(尹번)의 5대손, 세조와 남매인 우의정 윤사흔(尹士昕)의 현손이었고, 인종의 외조부로 그녀가 죽인 윤임(尹任)은, 윤사흔의 형 윤사균(尹士畇)의 증손이라 그녀의 9촌 숙부였다.
열일곱 나이로 30세 중종을 배필로 맞은 문정왕후는 사내를 통째로 녹이는 재주가 넘쳤던지 중종을 한 눈 팔지 못하게 사로 잡았다. 부지런히 생산은 했으나 10년 넘게 딸만 내리 넷을 낳고 고추 달린 아들이 나오질 않아 가슴이 탔다.
입술을 깨물고 힘든 고비를 극복하느라 용을 쓰면서, 몸이 허약한 전 왕비 장경왕후 소생 세자가, 행여 자기가 아들을 낳기 전에 어떻게 될 까 싶어 안절 부절이었다.
후궁 출신이지만 똑똑하고 장대하기로 소문난 경빈박씨 소생 복성군(福城君)이 중종의 둘째 아들로 버텨있었기 때문이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왕후는 마침내 복성군을 죽이기로 했다. 그게 아들 낳기 보다 바쁜 일이었다. 세자 거처에 불태운 쥐를 매달아「세자가 죽기를 기원하는 글」을 걸고, 이를 복성군 모자의 짓으로 몰아 붙이니,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하늘을 원망하며 죽어 갔다. 이른바『작서(灼鼠)의 변』, 그녀의 1차 음모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중종29년(1534) 5월 22일. 왕후는 마침내 17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때 세자 나이 20세. 이제 그녀의 꿈은 세자가 아들 없이 죽어 없어 지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2차 음모를 단행하니, 때는 1543년 차거운 날씨의 초정월, 날짜는 기록이 없다. 그때 왕후 아들(뒤에 명종)은 열 살. 세자가 없어지면 그 자리를 이을 딱 좋은 시기였다.
왕후는 무모하게 밤중에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 불을 질러 세자를 불태워 죽이고자 일을 꾸몄다.
화재는 날 수 있는 일이나 문이 밖에 잠겼으니 요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귀인(貴人) 정씨가 달려가 문을 부수고 세자 내외를 구하니, 왕후의 두 번째 음모는 실패로 돌아 가고 말았다.
귀인 정씨는 유명한 송강 정철(鄭澈)의 누이였다.
세자궁에 불을 지른 범인은 왕후 오라비 윤원로 짓이라는 공론이 자자했으나 수사는 흐지 부지 되고 말았다.
중종39년(1544) 11월 왕이 세상을 떴다. 나이 57세. 세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게 극히 순리였는데도 왕후는「세자 선망(先亡」꿈이 사그라져 심기가 틀어졌다.
성품이 여리디 여린 세자가 왕이 되니 이가 곧 인종(仁宗). 원래 허약한데다 상주 노릇하느라 몸이 몹시 시들어 버렸다.
왕후는 드디어 3차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생트집으로 인종을 괴롭혀 명대로 못살게하는 것이었다.
심지어「새왕이 대비 모자를 죽이려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인종으로 하여금 삼복 뙤약볕에 엎드려 석고대죄하게하는 등, 온갖 술수로 인종의 명줄을 갉았다.
그녀는 아우 윤원형으로 하여금 각처의 절간을 돌아 다니며「왕 요졸(夭卒)」을 부처 앞에 빌게 하고, 밤중에 남산에 올라 귀신을 꾸며 놓고「왕 급사(急死)」를 기원하게 했다.
결국 인종은 재위 8개월만에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 부처가 왕후편을 들었을까? 하늘도 무심했다.
왕후의 본심은 인종이 눈을 감자 곧 들어났다. 장례도 죽은 머슴 치우듯 치러 시신도 아무렇게나 묻고, 신주(神主)도 왕족들 신주전각 한쪽 구석에 처박아 버렸다.「왕노릇 한해도 못 채운게 무슨 왕이냐!」였다. 인종의 위패는 20년 후, 왕후가 없어진 뒤에 비로소 종묘에 들어갔다.
덜 큰 아들을 왕으로 앉혀 섭정대비가 된 왕후는, 치마 두른 암 도깨비가 밤을 만난 듯 한통을 쳤다. 아우 윤원형과 그 애첩 정난정을 앞세워 날마다 사람 잡는 판을 벌이니, 궁궐은 고문에 시달리며 울부짖는 비명소리로 밤낮 시끄러웠다.
왕자 계림군, 봉성군을 죽이고 오라비 윤원로도 권력에 장애가 된다며 죽였다. 정적 윤임 편에 섰던 신하들을 모조리 해 치운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목숨을 잃은 대소 신료들이 5~6년에 걸쳐 100명이 넘었다.
권력은 더럽고 변덕스럽다. 명종20년 4월 7일 장생불사하려던 왕후가 마침내 죽으니, 그나마 양심적이던 명종은 곧 대비의 그늘을 지우고 외숙 윤원형 내외를 추방시켜 버리니, 그들이 벌인 잔혹사는 끝을 맺고 역사는 새로 시작되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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