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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98

by 까망잉크 2018. 11. 11.


<조선왕조 뒷 이야기> 98(주)하동신문 
『살아 숨쉴 때의 부귀영화는 산마루에 걸린 한점 구름이요. 세상을 밝힌 맑은 명예는 하늘에 빛나는 해와 같다.』 
선현들이 남겨준 들어 둘만한 말이다. 
연산군7년 합천에서 태어난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일찍 학문을 이뤘으나 벼슬에 눈독을 들이질 않았다. 나이 서른에 생계가 어렵자 처갓곳 김해로 옮겨,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중종34년(1539) 입소문으로 조식의 명성이 퍼지자, 조정은 그를 종9품 헌릉(獻陵)참봉에 임명, 오늘날의 서울 서초구에 자리한 태종 내외의 무덤을 관리하라했다. 조식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경상도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니, 요즘으로 치면 시골의 한 사립초등학교 교사를 도지사가 만나보려는 격이었는데, 조식은 한마디로 싫다했다. 
명종4년(1549) 조정은 다시 그를 종6품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로 특임하여 불렀다. 전생서는 궁중 제사나 잔치에 쓸 가축 나부랭이를 기르는 관청이었으니, 직급이 제법이긴 하나 깔끔한 선비가 넘볼 자리는 못됐다. 조금 높혀 부른다고 나갈 조식이 아니었다. 
3년 뒤 이번에는 왕실의 족보 손질과 함께 종친들의 화목과 행실을 규찰하는 종부시(宗簿寺)의 주부에 발령을 냈는데, 역시 조식은 들은 척도 안했다. 
동갑내기 이황(李滉)이 제발 나라를 위해 쌓은 학덕을 묵히질 말고 벼슬을 받아 경륜을 펼치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그는 요지 부동이었다.
조식은 늘 책을 읽거나 명상에 잠겨 정신을 가다듬었다. 혹 졸음이 덮치면 지닌 장검을 어루만지며 잠을 쫓았다. 긴 칼자루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內明者敬(내명자경). 外節者義(외절자의)』
풀이하면 「내 자신 안으로 밝게함은 경(敬)이요, 밖으로 유혹을 끊음은 의(義)로다.」 이른바 「경의(敬義) 정신」 이었다.
명종11년(1556), 조식 나이 56세. 조정은 그를 고향 근처의 단성(丹城)현감직을 내렸다. 주변에는 그에게 한 고을을 맡아 선정을 베풀라고 권하는 말이 빗발쳤다.  
그러나 그는 이런 말로 거절했다. “내가 나가지 않는 것은 재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많은 제자를 길러 그들에게 많은 일들을 맡기려는 것이다. 내게 한가지 장점이 있다면 죽어도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 무렵 나라 형편은 썩을 만큼 썩었을 때였다.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국적 윤원형이 우의정을 겸해 백관의 인사권을 거머쥔 이조판서 자리에 앉아 노략질을 일 삼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천지에 가득했다. 
윤원형이 저지른 매관(賣官) 작태에 이런 기막힌 일도 있었다. 
합천출신의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정세필(鄭世弼)의 말이 명마(名馬)로 알려졌다. 욕심을 낸 윤원형이 「말을 주면 벼슬을 올려 준다.」 며 정세필을 꼬드겼다. 정세필은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5대손으로 강직한 청백리였다. 
그는 『내 어찌 윤가와 엮일수 있나!』 하고 말을 목베어 버리고, 관복을 벗어 팽개치고 말았다.
남명(南冥) 조식이 인간 말종(末種) 윤원형을 모를리 없었다. 그는 분연히 단성현감 사직 상소를 올리니, 이른바 단성소<(丹城疏)>였다. 임금 명종에게 읽으라고 올린 글의 줄거리는 대개 이랬다.
『전하의 정치가 이미 그릇되어 나라의 근본이 벌써 망해 가고 이미 하늘의 뜻도, 민심도 떠났습니다. 비유하건대 백년 묵은 큰 나무에 벌레가 들어 속을 다 파먹었고, 수액(樹液)조차 모두 말라 버린 것과 같습니다. 
(중략) 작은 벼슬아치들은 시시덕 거리며 주색만 즐기고 큰 벼슬아치들은 오직 재물 늘리기만 힘쓰니…, (중략) 지방 관리들은 이리떼가 들판에서 날뛰듯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중략)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선왕의 고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백천가지로 달려 오는 하늘의 재앙과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찌 감당하고 다스리겠습니까?』
이때 명종의 나이 27세. 철이 들 만큼 들었을 때였다. 지난해 황해도에서 칼을 빼든 도적 임꺽정(林巨正)무리들이 올해 9월에는 서울까지 파고 들어 조정을 위협하니, 명종도 민심의 어지러움은 가늠하고 있어, 바른말로 한방 먹인 산림처사 조식을 어쩌질 못하고 다시 벼슬을 내리니, 이번에는 종이 제조와 관리를 맡은 조지서(造紙暑)의 종6품 사지(司紙)자리였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지 않은 조식은 이듬해 거처를 산청 덕산으로 옮겨 강학(講學)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다.
훗날 임진 왜란이 터지자 조식의 제자들에서 의병들이 쏟아져 나와 나라를 건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비맞은 개똥 같은 윤원형의 이름은 조식의 명성에 더욱 윤기를 보탠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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