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06
우리민족 고유의 풍속으로 해가 바뀌면 누구나 한해의 운수를 점쳐 보는데 썼던 도참서 <토정비결>. 태어난 해를 태세(太歲)·생일이 속한 달을 월건(月建)·출생일을 일진(日辰)이라하고, 여기에 숫자를 붙혀 헤아려, 새해의 길흉화복을 흥미 삼아 점쳐 보는 <토정비결> 보기는, 우리 사회에 깊히 뿌리 내린 오랜 「세시(歲時)풍속」 이었다.
<토정비결> 작자로 알려진 「토정」은 선조 중기 <주역>에 통달했던 이지함(李之函함)의 아호다.
본관이 한산, 고려 명신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감 이치(李穉)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형 이지번(李之蕃)에게서 배우다가 유명한 서경덕(徐敬德)의 제자가 되어, 복서(卜筮)·천문·지리·음양 등을 익혀 달통한 경지에 이르니, 「토정 선생」 으로 떨친 그의 인품은 실로 서경덕의 영향이라 할 수있다.
선조6년(1573) 이지함은 세간의 추천으로 나이 56세 때 포천 현감이 되었는데, 그 해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예견, 방책을 세워 많은 인명을 살려 내 세상을 놀라게했다.
현감 재직 이듬해 「민심을 떠난 정치」 에 실망, 그만 자리를 내 놔 버렸다.
포천을 가로 지르는 임진강에 설치된 고기잡이 어량(魚梁)을, 가진 것 넘치는 왕자나 공주들이 독차지, 굶는 백성들은 눈앞의 소득을 구경만 하는 꼴이라, 이지함은 어량을 백성들에게 돌려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조정은 눈도 껌벅 않고 「달 보고 짖는 개소리」로 여기니, 그만 미련 없이 관직을 팽개쳐 버렸던 것이다.
선조는 그를 다시 아산 현감에 등용하니, 그는 부임하는 날 번화가에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떠도는 거지와 힘 잃은 노약자 등, 먹이에 허덕이는 백성들은 누구나 입에 풀칠을 하게 만들어, 죽어 가는 백성들 명줄을 잇게 했다. 죽지 못해 사는 민초들을 눈여겨 본 이지함은, 오늘날의 서울 마포나루 강변에 흙담을 쌓아 만든 토굴 같은 거처에서 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다.
그의 아호 「토정」 은 곧 「흙집」 이 아닌가. 비슷한 시기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그를 찾아 보고 「조선의 도연명(陶淵明)이라했고, 예학의 태두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 예조참판 김계휘(金繼輝)는,「 조선의 제갈양(諸葛亮)」이라했다. 또한 율곡 이이(李珥)는 한 술 더 떠 그를 실용적 재목이라기 보다 「기화이초(奇花異草) 같다」 했으니, 곧 신비로운 꽃이라는 뜻이었다.
이지함은 왕족 집안으로 장가 들었다. 혼례를 치른 이튿날 나들이를 하고 들어 왔는데, 입고 나갔던 도포가 띠와 어깨만 남았다.
까닭을 물었더니, 거리에서 떨고 있는 세 어린애를 만나 도포를 세 등분으로 찢어 입혀 줬다했다. 「토정비결 이지함」 이 아니라 「성인 이지함」 이었다. 이제 「토정비결」 사연을 살펴 본다.
현감으로 나가기 전 이지함은 <주역>의 괘를 뽑아 어려운 사람들의 운수를 봐줬는데, 딱딱 들어 맞는 그의 점괘 소문을 듣고 찾는 방문객이 사립을 메웠다.
이웃의 한 선비를 비서로 채용, 점괘를 쉬운 말로 풀어 주는 역할을 맡겼더니, 그 선비는 이를 낟낟히 기록, 책으로 만들었다.
포천 현감으로 나가던 날, 선비가 점괘 풀이 책을 빼 돌리는 것을 모르는 체하며 마음 속으로, 그가 서민들 운수를 봐 주고 부모 봉양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싶었다.
뒤에 현감직을 내 던지고 돌아와 보니, 그 선비는 용한 점쟁이가 돼 큰 돈을 모았다는 소문이 높았다. 이지함은 「못된 자가 서민들을 등쳤구나」 싶은 괘씸한 생각에서, 선비에게「고칠 부분이 있다」 며 책을 가져 오게했다.
선비는 「가끔 틀리기도 했던 점괘를 이제 손질하게 됐다」 싶어, 곧장 손때 묻은 문제의 책을 갖다 바쳤다. 이지함은 빼앗듯이 책을 낚아채 불문곡직 불타는 아궁이에 던져 불사르며 꾸짖었다.
“이 사람아! 그 책 감추는 것을 못 본 척함은 자네가 노부모를 모시기에 혹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는데, 그걸 가지고 축재를 하다니…!”
선비는 혼비백산 빈손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뒤적였던 책 내용을 기억으로 더듬어 재정리하니, 그게 세상에 퍼진 <토정비결>이 됐다.
오늘날 토정비결이 맞기도하고 틀리기도하는 것은, 그 선비가 온전히 기억해 내질 못한 대목이 있기 때문이라했다.
이지함은 3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일찍이 부모를 장사 지낼 때 풍수가 길지(吉地)라며 잡은 묘터를 두고, 정승 둘이 날 자리이긴 하나 막내에겐 불길하다며 이지함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이지함은 자신의 「불길」 보다 「두 정승」 에 무게를 더 두어 그 터에 부모 묘를 짓게 했다. 그는 선조11년(1578) 7월 초하루, 62세 생애로 백옥루(白玉樓)의 식구가 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큰 조카 이산해(李山海)가 영의정, 또 다른 조카 이산보(李山甫)는 좌찬성에 올랐는데, 그의 큰 아들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또 한 아들은 왜란 때 전사해 버리는 비운을 겪었다.
정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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