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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107

by 까망잉크 2018. 12. 4.

 

조선왕조 뒷 이야기> 107

 

(주)하동신문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움이나 위대함도 어머니의 삶보다 더 아름답거나 위대하지 못하다.』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꿀 수 없는게 사람목숨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기꺼히 목숨을 버린다.』
몇년 전 중국 태산(泰山)에 올랐다. 높이 1532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다.  그래도 중국 5악(五岳)에 속한 명산이라 찾는 사람이 많았는지 정상에는 숱한 역사적 인물들 흔적이 틈틈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일행 가운데 한사람인 명지대학교 홍(洪)모 교수에게 물었다.
“양사언(楊士彦)의『태산이 높다하되…』라는 시조에 나오는 「태산」 이 바로 이산이지요?” 홍교수는 마침 「양사언의 문학과 생애」를 공부하여 먹고 산다며 「그렇다」 했다.
그 교수가 들려준 말들 가운데 양사언 어머니 이야기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 돈녕주부 양희수(楊希洙)의 둘째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가 신분이 흐린 후실이었다.
그녀가 양반 첩실이라는 허물을 썼다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린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했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가 전라도 영광군수로 부임해 가던 어느 봄날, 간밤 축하연에서 마신 술 때문에 아침을 걸렀더니 쉽게 배가 고팠다. 어느 민가를 찾았는데, 마침 어른들은 들일 나가고 과년한 소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어, 그 소녀로부터 끼니 대접을 받았다.
군수는 소녀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너무 고마워 몸에 지녔던 청선(靑扇)·홍선(紅扇) 두개 부채를 주며 농담조로 말했다.
“이는 고맙다는 표시로 네게 채단(綵緞)으로 주는 것이니 받으라!”
「채단」 은 결혼 전 신랑측이 신부집에 보내는 예물이 아니던가. 소녀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으리오!」 하더니, 급히 방으로 들어가 붉은 보자기를 갖고 나와 두개의 부채를 받아 고이 싸서 안고 들어갔다.
부임지에서 군수 양희수는 그럭 저럭 세월을 보내며 수령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데, 어느날 부채를 받은 소녀의 아버지가 찾아와 말했다.
“나이 찬 제 딸년이 달리 시집을 가지 않겠다며 사또와의 혼사를 고집하니 살펴 주시요!”
요샛말로 「책임을 지라」 는 것이었다.
양희수는 도리 없이 날을 잡아 문제의 「부채소녀」 를 아내로 맞았는데, 이미 정실 부인에 양사준(楊士俊)이라는 아들 까지 있었으니, 소녀는 소실이 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첩실 소녀는 사언·사기(士奇) 두 아들을 낳으니, 양희수는 신분이 다른 세 아들을 두게 되었고, 모두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은 중국의 소식(蘇軾)·소순(蘇洵)·소철(蘇轍) 3형제와 비견 된다했다.
그런 한참 뒤 정실부인이 죽었다. 양희수는 양사언 어머니를 후처로 삼아 아들들을 돌보게했다.
그러나 국법상 첩의 신분으로 낳은 아들은「영원한 첩자식」이었다.
마침내 양사언의 아버지도 세상을 떴다.
장례를 치르던 날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양사언의 어머니는 눈물을 비오듯 쏟으며 정실 맏아들 양사준에게 간곡히 청했다.
“내가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아 그들이 모두 재주있고 총명하며 풍채가 당당하나 미천한 「첩 자식」 일 뿐이오.  이 첩 또한 서모라는 이름으로 죽으면, 우리 큰 아드님께서는 석달 밖에 상복을 입지 않을 것, 그리 되면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영원히 면하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지금 목숨을 끊어 영감님과 함께 묻히고, 아들들이 3년상을 같이 치러주면 나는 「첩 대접」 에서 벗어 나고, 내 아들들도 「서자」 라는 흠을 벗지 않을까 싶으오! 약속만 해 준다면 지금 나는 기꺼히 죽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오!”
양사언의 어머니는 말을 마치자 순식간에 가슴속에 품었던 단검을 꺼내 서슴없이 목숨을 끊고 말았다.
아들들이 쓴 멍에를 풀어 주고자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린 그 어머니의 모습은 참으로 비장했고, 두 아들은 드디어 광명을 찾았다.
양사언은 명종1년(1546)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이름을 떨쳤고, 양사기는 명종7년(1552) 과거에 급제, 호조좌랑을 거쳐 7개 고을 수령을 역임하며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양사언은 한석봉·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서예가이며 문장가로 꼽혔고, 안변군수를 끝으로 선조17년(1584) 68세 나이로 숨졌다.
양사언의 형 양시준은 첨정(僉正)까지 올랐는데, 성품이 인자하고 행실이 발라 청백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霜與水反壑
서리 녹아 내린 물 골짜기로 흘러가고
風落木歸山
바람에 진 낙엽 산으로 돌아 가네
염염歲華晩
어느덧 세월 흘러 한해가 저물어 가니
昆蟲皆閉關
벌레들도 모두 숨어 움츠리네.

양사언이 남긴 「금강산 시」 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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