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08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는 보도에 접하니, <난중일기> 내용 가운데의 이런 기록이 머리에 떠 올라 재삼 장군의 소박한 인간성에 마음이 간다.
『…다음날 하동현청에 닿았다. 현감 신진(申진)이 밤을 새워 위로해 주었다. 이틀 동안 머물고 6월1일 길을 떠나는데, 신 현감은 정성들여 노자(路資)를 실어 주었다. 기름종이 하나, 장지 2축, 백미 1섬, 참깨 5말, 들깨 3말, 꿀 5되, 소금 5말 등이었다.』
충무공은 고려 때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를 시조 삼은 덕수(德水) 이씨, 그의 직계 조상에 조선 초기 병조와 공조의 판서를 지내며 성품이 지나칠 정도로 곧았다고 기록 된 이변(李邊)이 있었고, 이변의 손자 호군(護軍) 이거(李据)가 공의 증조부라, 그도 역시 『너무 강직하여 부정한 관리는 불문곡직 탄핵하였다』 라고 실록에 올라 있다.
장군의 조부 사헌부장령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 때 처형 당해버리니, 그의 가문은 폐가 지경에 이르렀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장군의 아버지 이정(李貞)은 출세를 단념, 한양을 떠나 처가 곳인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 농사에 매달리니, 아산이 고향이 돼 버렸다.
장군은 인종즉위년(1545) 양력으로 헤아려 4월 28일, 오늘날의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4형제 가운데 셋째로 태어나니, 위로 형 희신(羲臣)·요신(堯臣), 아래로 우신(禹臣)이 있었다.
글을 부지런히 읽던 충무공은 무슨 영문이었는지 무(武)의 길을 택해 28세 때 무과에 응시했다가, 달리던 말이 거꾸리져 다리가 부러지는 통에 그만 낙방하고, 4년 뒤 32세 때 비로소 등과, 백두산 언저리 두만강변 동구비보(童仇非堡) 권관(權管) 자리를 받으니, 요즘으로 치면 육군 소위를 달고 최전방 부대 소대장이 된 격이었다. 이후 그는 한양에 돌아와 훈련원봉사(奉事), 충청병사 군관, 전남 고흥의 발포만호(鉢浦萬戶)가 됐다가, 상관들의 부당행위를 거역, 관직 5년만에 그만 파면되고 말았다.
훈련원봉사 때 「부하를 특별 승진 시켜라」는 상사의 압력을 듣지 않았고, 발포만호 때는「거문고를 만들고자하니 영내의 오동나무를 베어 보내라」는 상급 기관장의 지시를 어겼다가 미운털이 박혀 버린 장군은, 상사들의 눈총을 피 할 도리가 없었다.
훈련원에서 일할 때 그를 알아 본 병조정랑(국방부인사담당 국장) 김귀영(金貴榮)이 서녀(庶女)를 소실로 주고자 청을 넣었더니,
“권문세가와 연(緣)을 맺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며 거절했다.
왜란 극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나이는 장군보다 세살 위였으나 한 동네서 딩굴었던 소꼽 친구였고, 율곡 이이는 종친으로 장군보다 아홉 살 위였는데 촌수는 19촌 조카 뻘이었다.
장군이 훈련원에 속해 행차길의 임금이 탄 연(輦)을 호위하던 어느날, 도승지(왕의 비서실장) 유성룡이 장군을 만나 소매를 끌며 말했다.
“율곡대감을 한번 만나 보오! 공에 대하여 생각이 많은가 보오!”
“종친을 함부로 찾았다가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 피차가 난처해지고, 그분의 심상(心象)에 흠이 되질 않겠오!” 하고 마다했다.
파면 당한 장군이 할 일 없이 쉬고 있는데, 그가 지닌 화살통이 명품이라 소문을 들은 병조판서 유전(柳琠)이, 화살통을 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장군은 간곡히 일러 거절하는 뜻을 전했다.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별것 아닌 것 때문에 흉한 소문이 날까 두렵오!” 유전도 나중에 영의정까지 오른 걸물이라 장군의 속내에 감동, 극구 칭찬하고 자신의 처신을 부끄러워했다.
집안 조카 율곡 이이가 백관의 인사권을 거머쥔 이조판서, 어릴 때 친구 유성룡이 도승지를 거쳐 정계의 우두머리 영의정까지 오르니, 이순신의 관직 배경은 참으로 화려했던 셈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어릴 때 성품을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놀이를 좋아했고, 자기 말을 안 듣는 애는 눈에 활을 쏴 버릴 만큼 지독해 어른들도 피했다.』 한마디로 장군은 「업무에는 엄정하고 공사(公私)가 분명했으며, 전투에는 과감한 ‘독종(毒種)?’」 이었다. 이는 가맥을 통해 이은 기질이 아니던가 싶다.
<난중일기>에 실린 하동현감은 둘이다. 장군이 첫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 때 겁을 먹고 도망치려했던 성천우(成天佑)와, 백의종군 길에 자신을 밤새워 위로해 줬던 신진, 성천우는 곤장 90대를 쳐 파직 시켜 버렸고, 극진했던 신진은 잊을 수없어 했다.
왜란 직전 유성룡은 이순신을 정읍현감에 앉혔다가 일약 여섯 단계를 넘어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 거덜 날 뻔했던 나라를 건지게하였다.
충무공 순국 100년 뒤, 숙종은 현충사를 세우고 이런 제문을 지어 그의 거룩한 충정을 기리며 눈물겨워했다.『…절개에 죽는다는 말 예부터있지만 제몸 죽어 나라 살린 이, 이분에서 처음 보네!』
정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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