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10
『천하의 일은 나아 가지 않으면 물러 서야하고, 국가의 형세는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진보(進步)와 쇠퇴, 평화와 혼란이 오는 것은 실상 인간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백성과 임금은 마땅히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기미(幾微)를 살펴 평화가 이룩되게 힘쓰고, 혼란이 오지 않도록 원인을 제거하여, 반드시 치세(治世)를 기약하도록 해야 할것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한 말이다.
중종31년(1536) 12월 26일 새벽 강원도 강릉 외가 오죽헌에서 태어난 율곡의 아버지는 덕수(德水)이씨 이원수(李元秀), 어머니는 조선 대표적 여류예술가 신사임당(申師任堂), 어머니가 바다에서 솟은 용이 집으로 날라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았다하여, 초명은 현룡(現龍)이었고, 산실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했다.
세살 때 어머니로부터 글을 익히기 시작한 율곡은, 여섯 살 때 서울 본가로 옮겼다가, 이듬해 선대의 고향인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 파평면 율곡리로 이거, 그의 호 「율곡」 은 곧 그가 어려서 살았던 터에서 딴 것이었다.
율곡은 타고난 천재였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16세 때 그만 어머니를 잃었다.
그때 아버지가 나라 세곡을 뱃길로 운반하는 일을 맡은 수운판관(水運判官)이라, 율곡이 평안도로 출장 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그 틈에 서울 삼청동 집에서 그만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임종을 보지 못한 율곡은 3년 동안 시묘를 살면서 공부만 했다.
그는 어머니와의 사별이 너무 사무쳐, 유학으로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19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지 않은 채 불경을 읽었다.
다시 속세로 내려온 율곡은 한성시(漢城試)에 장원급제,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고, 22세 때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는 처가를 왕래하던 어느날, 근처 예안(禮安)에서 학문에 몰두하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 학문을 논하여 35세 연상인 이황을 감동시켰다.
명종16년(1561) 26세 때 아버지 상을 당해 다시 3년간 시묘를 살았고, 29세 때 문과에 올라 호조좌랑이 되었다. 그는 몇차례 과거시험에서 모두 아홉 번 장원, 「구도장원(九度壯元)」 으로 불리웠다.
그는 청빈 성실한데다 학문이 높아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하였다.
청주목사, 황해감사, 대사간, 호조·형조·병조·이조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며 한결 같이 나라를 걱정하였다. 왜란을 예견, 국방강화를 역설하였고, 당쟁을 완화하고자 애쓰다가 당파들의 오해와 공박을 받았다.
선조16년(1583) 4월 율곡은 초당파적 인재 등용, 10만 양병, 폐정혁신, 서얼(庶孼) 허통(許通), 공사노비의 신분 해제 등 시무6조(時務6條) 시정책을 상소했다가,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아 해주 석담(石潭)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해 9월 다시 이조판서에 기용되어 격무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1월 6일, 서울 인사동 집에서 49세 일기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제대로 먹지 못한 허약한 몸으로 임금의 명을 받아, 임지로 떠나는 지방관을 간곡히 격려하고는, 곧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으니, 분명한 과로사(過勞死)였다.
율곡이 눈을 감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선조가 대성통곡하니 곡성이 대궐을 울렸다. 시골 촌민들이 머리를 모아 통곡하고, 태학생, 금군(禁軍), 하급 관리, 관청의 아전들이 몰려 들어 제전을 올리며 슬피 울었다. 발인하는 날 횃불을 들고 상여 앞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열이 수십리 길을 메웠고, 동리마다 슬퍼하는 곡성이 진동, 들판에 가득했다.
집에는 남은 양식이 없었고 방에 책만 가득했다. 남의 옷을 빌려 염습하였고, 변변한 거처가 없어 처자가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느라 추위에 떨었다. 영남에 살던 명상 유성룡(柳成龍)이 원근의 친척들이 모여든 가운데, 아버지 축수(祝壽)잔치를 벌이다가, 율곡이 세상을 등졌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잔치를 파해 음식을 감춰 버리고 먹지 않았다.
청빈이 몸에 배인 율곡은 처가에서 사준 집도 팔아 가난한 친척들에게 나눠 주고, 고향 석담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한집에 모여 기거하는 식구들이 많아 양식이 늘 모자랐다. 자신은 죽으로 끼니를 잇는 일이 매일이었고 점심은 늘상 굶으니 건강이 온전 할리 없었다.
경기도 파주 자운산(紫雲山)기슭에 율곡의 묘소가있다. 율곡은 임진란 발발 8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그의 부인 노씨는 임진 왜란 때 시녀와 함께 피난했다가, 겁박하며 덤비는 왜군들과 맞섰다가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시신을 1년 뒤에 수습하니 누가 율곡의 부인 노씨인 줄을 몰라, 짐작 가는 시신을 부인으로 인정, 합폄하지 못하고 뒤편에 안치했다. 경내에는 영의정 이항복이 지은 신도비와, 훗날 좌의정 송시열이 지은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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